지난 기획/특집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92) 제2차 세계대전과 교회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3-10-19 수정일 2003-10-19 발행일 2003-10-19 제 2369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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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교회는 위험한 저항세력”
정교조약 불구 공공연한 탄압 계속
일부 “히틀러 정권에 협력” 주장도
예수회 소속의 역사학자 찰스 R. 갤러거는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예수회 잡지 「아메리카」 9월 1일자에서 교황 비오 12세에 대한 불명예스러운 혐의를 씻어줄 또 하나의 사실을 보고했다.

갤러거는 이 보고서에서 교황청 국무원장으로 후에 비오 12세가 된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이 고위급 외교관들과의 모임에서 나치와 히틀러에 대해 이교도이며 반종교적인 인물이라고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파첼리 추기경이 히틀러 정권에 대해 전혀 어떠한 정치적 타협의 여지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비오 12세는 일부 사가와 유다교 지도자들로부터 나치 대학살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나치 독일에 협력했다는 비난과 혐의를 받아왔다. 이러한 혐의는 사실 매우 오래된 것이다. 최근 들어 교황청이 비오 12세의 시복 문제를 놓고 검토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다교 학자들은 격렬한 반대 의사를 표시해왔다.

교황청은 지난해 2월 성명서를 통해 바티칸 비밀문서고의 제2차 세계대전 관련 문서들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 문서들은 교황청과 독일과의 관계 및 비오 12세가 전쟁 기간 중 유다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시도했던 노력들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담고 있다.

비오 12세에 대한 혐의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고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잔혹한 시대에 교회가 과연 무엇을 했고, 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얼마 전인 1939년 2월 10일 전임 교황 비오 11세가 타계했다. 추기경들은 오랫 동안 교황청에서 근무해온 법률가 집안 출신의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했다. 추기경들은 그 외에는 결코 무서운 곤궁의 시대를 거슬러 베드로의 배를 조종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교황청 국무원장으로서 비오 11세 교황 밑에서 1930년 이래 교황청의 정치적 진로를 결정지었고 히틀러와의 관계에서도 교황청의 입장을 주도했었다. 특히 비오 11세의 정교 조약 정책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1933년 6월에 오스트리아, 7월에 독일과 정교 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독일과 맺은 정교 조약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1934년까지는 히틀러 자신이 표면에 나서지는 않고 「위장된 조치」들로 가톨릭 지도자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이후 공공연한 탄압이 시작됐다. 모든 영역에서 교회 생활이 제한됐고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체포됐다. 1938년 11월 유다인에 대한 최초의 조직적인 대학살이 실시됐다.

전쟁 발발 후에도 교회에 대한 탄압은 이어졌다. 정복된 폴란드에서는 교회가 근절됐고 유다인에 대한 섬멸 계획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청산을 위한 잔혹한 탄압이 진행됐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을 했던가. 나치 독일의 범죄 행위가 지닌 잔혹함과 방대함에 비추어볼 때 교회의 저항은 불충분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교회는 많은 이들에게 비난을 받아왔다. 하지만 적어도 그리스도교는 당대의 모든 사람들과 수난을 함께 했다는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교회의 저항은 끈질기고 격렬했다. 교회는 나치 정부에 의해 가장 위험스러운 적으로 인식됐던 유일한 저항 세력이었다.

비오 12세는 당연히, 전쟁을 막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히틀러와의 외교 교섭이 1939년 5월초 좌절되고 8월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 사이에 폴란드가 양분되자 교황은 『평화와 함께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전쟁과 함께 모든 것을 잃는다』고 마지막으로 평화를 호소했다.

교황은 전쟁 기간 내내 이러한 입장을 고수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침묵을 지켰다. 사실 히틀러 전쟁의 윤리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교회 내적으로 필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두가, 특히 독일의 주교와 신자들 모두 이에 대해 명백히 알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교황의 이러한 입장 표명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데 불과했다.

그리하여 비오 12세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그는 인도주의와 평화,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돌아가도록 모든 이들에게 더욱 강력하게 호소했다.

주교들은 정부에 대해 항의서와 사목서한을 통해 반대했다. 이미 1933년 시작된 항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쾰른의 슐트 추기경은 1934년 2월 히틀러를 직접 방문해 항의한 뒤 이렇게 말했다. 『히틀러는 무서인 인간이다. 우리는 그로부터 더 무서운 일을 겪게 될 것이다』

정교 조약 체결 후 주교들은 정부의 조약 사항 위배를 비난했다.

히틀러는 정교조약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탄압했다.
1937년 비오 11세 교황은 회칙 「미트 브레넨데르 조르게」(Mit brennen der Sorge)를 발표해 독일의 인종 차별주의와 나치즘을 비난했다. 그 회칙은 사실상 파첼리 추기경이 작성한 것이다. 대단히 구체적이고 예리한 표현으로 작성된 이 회칙은 히틀러의 정치 체제에 대한 최대의 고발이었다.

독일 교회 역시 침묵하고 있지는 않았다. 뮌스터의 주교 폰 갈런의 용감한 설교는 1941년 전 독일을, 아니 전세계를 한 바퀴 돌았다. 나치 지도자 마르틴 보르만은 그를 교살하려 했지만 사람들의 눈 때문에 전쟁 동안은 그를 해칠 수 없었다.

당시 역사 속에서 교회는, 주교들은 유다인 박해를 비롯한 인간성 말살의 행위들을 혹은 묵인하고, 혹은 반대해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처형됐다. 그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그것은 오늘의 잣대로만, 혹은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상황이었다는 변명의 어느 한 쪽으로만 예단할 수 없는, 비극적인 역사의 한 장이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