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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은퇴 사제의 삶과 신앙] 대구대교구 김영환 몬시뇰 (16) 해북진 성당 완공

입력일 2003-10-12 수정일 2003-10-12 발행일 2003-10-12 제 2368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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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는 죽을 때까지 성실히 살아야한다” 실천
순교 각오로 중국행 결심
1993년 학교에서 퇴임을 한 후, 무엇을 할까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북경 유학생 신부가 있었는데, 내게 북경 한인천주교회를 맡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문희 대주교님과 상의했더니, 대주교님께서는 나의 건강을 염려하시며 여러모로 신경을 쓰게 되면 건강에 좋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신학교에서 반평생을 보내다시피 하며 학생들에게 「신부는 죽을 때까지 신부로서 성실히 살아야 한다」고 훈화도 하고, 영성지도 때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데 만일 학교를 그만 두고 난 후, 아직 건강한데도 불구하고, 골프나 치러 다니고, 술이나 먹는다면 졸업생 신부들이, 내가 학교에 있을 때 했던 훈화와 그런 내 모습을 비교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얘기했던 대로 죽을 때까지 신부로서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어렵다는 중국에서 몸을 바쳐 선교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 여겨졌고, 행여 공산주의인 중국에서 순교도 할 수 있다는 각오로 중국에 가기를 고집했던 것이다. 이후 중국에 선교하러 갔지만, 발령은 2년이나 뒤에 났다.

중국은 걱정하던 것보다 의외로 우호적이었다. 북경에서 처음 만난 주교는 주교회의 의장으로 「종 주교」였다. 그분은 참말 주교다운 말씀으로써 중국의 천주교회를 걱정하고 계셨다. 북경에 있는 동안, 자주 찾아뵙고 여러 가지 일들을 상의했었다. 왜냐하면 당시 공식적으로 한국인 천주교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종교사증이 아닌 방문사증으로 입국했기 때문에, 종교를 법적으로는 인정하지만 선교하기에 극히 까다로운 조건들이 많아 자칫 잘못하면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항상 불안했었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중국 정부나 인민을 염두에 두고 조심해야 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매주일 미사 때마다 공안 당국의 대여섯 명 감시원들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가 하면, 특히 강론 시간에는 한자한자 받아 적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인지 별탈없이 성사집행을 할 수 있었다. 부철산 북경 주교는 나만 보면 『중국 천지에 자국민처럼 자기 말로 중국 성당에서 미사를 지낼 수 있는 사람은 당신 한 명 밖에 없다』며 생색내고는 했다. 우리가 미사를 지내던 성당은 「동교민항(東交民巷) 천주교회」이다.

처음 150여 명 정도였던 신자들은 300여 명으로 점점 늘어, 성탄 같은 대축일 미사 때에는 500여 명도 넘었다. 당시 이요셉 회장 부부와 조회장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많은 도움을 주어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가끔 있었던 성당 행사 때는 학교 운동장을 빌려 운동회도 하고 강당을 빌려 회합도 했다. 지금도 그때 그 신자들은 내게 수시로 연락을 한다.

그러는 동안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해북진에 성당을 짓게 되었고 한국을 왕래하면서 성당을 짓기 위한 모금활동을 하기 바빴다. 시작하고 일 년 반이 지나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단시간 내에 모았는가 싶을 정도로 빨리 성당이 완성되었고, 봉헌식 때는 참말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이문희 대주교님을 비롯하여 많은 신자들의 도움으로 그렇게 빨리 성당 완공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00년 10월 19일 봉헌된 해북진 성당,
북경에 있을 때 김수환 추기경께서 북경을 방문하여 격려해주신 일도 참말 잊지 못할 기억이다. 또 한번은 「황장엽 사건」 때 성당에서 집회를 불허했기 때문에 내가 살던 아파트에 화장실이고 복도고 할 것 없이 빼곡히 150여 명 신자가 모여 미사를 드린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도 이해를 못할 것은, 아파트 주민이나 관리자들이 아무 말도 없이 협조해 준 일이다. 아마도 이런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에 틀림없다.

6년 가까이 북경에 사는 동안 마음은 항상 졸였었지만, 하는 일에 만족했었고 지금 생각해도 그때가 행복했었다. 나이 일흔이 되자 현역에서는 은퇴해야 한다는 교구 방침에 따라 귀국해야만 했다. 귀국 후, 교구청 사제숙소에서 이제껏 지내고 있다.
해북진 성당 봉헌미사 후 지린교구장 쟝한민 주교(두 번째 줄 가운데)와 필자 등 미사를 공동집전한 사제단이 기념촬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