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은퇴 사제의 삶과 신앙] 대구대교구 김영환 몬시뇰 (15) 중국 전교 활동

입력일 2003-10-05 수정일 2003-10-05 발행일 2003-10-05 제 2367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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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정년퇴임 후 중국 선교에 최선
인민위서 성당 지어달라 요청
효성여자대학교 총장이 된 후, 학생들만 데모를 하는 것이 아니고 데모의 많은 부분의 많은 역할을 한 사람들은 교수들이었다. 교수들은 학교 본부에 대한 불만과 재단에 대한 불만을 교묘히 학생들에게 왜곡 주입시켜 흥분하게 만들어, 학생들은 데모의 행동대원으로 나서게 하는 것이다. 데모의 또 한 가지 원인은 정치계에 있었다. 정권교체를 목적으로 정부에 대한 비방이나 잘못을 학생들에게 말해줌으로써 학생들을 선동했던 것이다. 이상의 것들은 정치도덕상 있을 수 없는 것들을 후진국에서 흔히 써먹는 수법이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아직도 정치판에 통하고 있다니 통탄할 일이고, 우리는 언제 한 번 선진국이 되어보나 하는 비애감마저 든다.

학교에 총장으로 있는 동안, 여자대학이기 때문에 남녀 공학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교무회의 때 그런 뜻을 밝혔다. 그때부터 효성여자대학교는 여자대학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데모가 또 시작되었다. 동창회에서 버스 네 대를 동원해서 시내에 있는 많은 동문들을 태우고 총장 면회를 요구했다. 그 자리에서 대학의 발전상, 공학은 당연한 것이고 옛 것에 연연하고 있으면 그만큼 발전이 더뎌진다고 설명했지만, 졸업생들은 막무가내로 여자대학을 고수하기를 주장했다.

이미 옛말이 되었지만, 가톨릭대학교(신학대학)과 효성여자대학이 합쳐지고 난 다음, 효성여자대학 동문들은 학교 이름 문제로 또 한번 대학본부와 격돌했다. 그 결과, 얼마나 많은 손해를 봤는지 모른다. 금전적인 문제보다도 대학 위상상 받은 타격은 말할 수도 없다. 많은 시민들 가슴에도 상처를 주었다. 하지만 동문들과 대학 본부 사이에 어려운 사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뜻있는 동문들은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학교 발전이라는 것을 알고 마음 아파했다.

4년이라는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총장직을 맡고 4년 동안 데모만 치루다가 총장으로서 할 일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임기를 마치게 되었다. 회고해 보건데, 많은 좋은 교수들도 있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교수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어떤 교수는 30년 동안 다 떨어진 노트 한 권으로 학생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 교수에게 배운 학생이 졸업해서 교수가 되어 학교에 와 보니, 아직까지 그 교수는 그 노트로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한다.

이어 1992년 1월에 다시 대구가톨릭대학(신학대학)에 오게 되었다. 1995년 2월까지 신학교에서 학장을 역임하다가 문교부 규칙상 65세로 1995년 2월 28일, 퇴임하게 되었다. 신학교에서 학생을 지도하면서 평생을 보내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게 학교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학교를 그만두기 한 학기 전에 퇴임 후에 어디로 갈까 생각을 하면서 중국여행을 가게 되었다. 북경에서 한국 신자들을 위해 신부님이 한 분 계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후 곰곰이 생각하다가 신학교 퇴임 후 대주교님께 중국 선교를 위해 떠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로부터 은퇴까지 중국에서 한국 주재원들 가족과 조선족 혹은 중국 사람들에게도 신앙의 전파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북경에 있을 때 옛날 어렸을 적에 살던 해북진과 선목촌에 갈 기회가 있어서 고향을 방문하는 마음으로 여행을 했었다. 그때 해륜시 인민위원회에서 옛날에 내가 거기 살았던 것을 알고는 해북진에 성당을 하나 지어달라고 요청해왔다. 그 당시 인민위원회에서 천주교 신부에게 성당을 지어달라는 요청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어떻게 되었는지 그런 요청을 해왔다. 요청을 받고 한국에 와서 모금을 해보고 대답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왔는데, 자기들은 그것을 승낙한 것으로 여겼는지, 아니면 밀어부칠량으로 그랬는지 돈을 보내라고 전화가 왔다. 알고 보니 내가 해북진을 떠난 다음, 인민위원회에서는 업자와 본당 신부를 불러서 인민위원회에서 책임을 질테니, 새 성당을 짓는 일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인민위원회에서 성당을 지으라니 우리가 부탁을 해서라도 할 일인데 싶어서 못이기는 척 하고 돈을 보내기 시작했다. 가톨릭신문사와 협의해서 모금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포항의 어떤 신자가 단독으로 성당을 짓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때 포항까지 직접 가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가톨릭신문사에서 하던 모금 운동은, 어떤 신자가 단독으로 성당을 짓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단독으로 성당을 짓겠다는 사람마저 부도로 소식이 없어졌다. 그러니 그 큰 성당을 짓는다는 것은 고스란히 나 혼자의 몫이 되어버렸다.

해륜현 해북진(海倫縣 海北鎭) 선목촌을 공소회장과 함께 돌아보고 있다.
어렵게 공사가 시작된 해북진 성당 건축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