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교부들의 가르침 (43) 파코미우스 / 하성수 박사

하성수 박사(한님성서연구소)
입력일 2003-09-28 수정일 2003-09-28 발행일 2003-09-28 제 2366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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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친교’…공주수도제도 보급
파코미우스
독수도제도와 공주수도제도

수도제도가 생겨나면서 그리스도교적 삶의 특수한 형태가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이 언제 시작하였는지를 확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긴해도 수도제도의 창시자는 안토니우스와 파코미우스임은 분명하다. 독수도제도(은수자로 사막에서 홀로 수도생활을 하는 제도)는 3세기 후반에 이집트에서 처음 생겨났다. 이곳 사막의 독수도자들은 복음의 정신을 철저히 따르고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고자 재산은 물론 사회적 교류까지도 포기하였다. 그러나 독수도 생활은 자체에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사막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영적 생활은 실패할 수 있었고, 경쟁삼아 금욕하다 파멸하는 수도자도 있었다. 또한 통제 없는 생활이 영적인 진전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을 통찰하고 미래지향적으로 변화시킨 인물이 파코미우스(292~346)였다.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 체득한 독수도제도의 위험을 피하면서, 은수자 생활에는 적응할 수 없지만 금욕생활을 하려는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공동체에서 공동으로 수도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였다. 이러한 공동의 수도생활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파코미우스는 자신의 조직력과 추진력을 발휘하여 수도생활을 조직화하였다.

생애와 수도원 생활

파코미우스는 3세기 말경 상부 테베 지방에서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군인이 되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의 아낌없는 자선행위를 보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군을 나온 뒤 세례를 받았으며 처음에는 사회복지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뒤 몇 년 간은 경험 많은 팔라몬의 지도를 받는 은수자로 살았다. 320년경 그는 타벤네시로 가는 길에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여기에 머물러 수도원을 세워라. 수도자가 되려는 많은 이가 너에게 올 것이다』. 파코미우스가 창립한 공동체의 새로운 점은 무엇보다도 규칙서였다. 파코미우스 규칙서의 토대이며 모든 사항에 기준이 되는 것은 성서였다. 이러한 특징이 공동생활을 강화하는 모든 규정과 규칙서의 척도였다. 이 규칙서에는 과장된 단식, 노동, 기도 또는 외부세상과 단절을 표현한 과장된 내용도 없으며 서원도 없다.

수도원은 하나의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문지기 집을 통해서만 수도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중앙에 공동으로 미사를 드리는 공간과 모든 수도자가 함께 식사하는 식당이 있었다. 수도자들은 저마다의 소명에 따라 더 작은 무리로 나뉘어 약 20명씩 한 명의 장상 아래 독자적인 집에서 살았다. 수도자들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노동을 하였는데, 노동은 거대한 수도 공동체를 경제적으로 꾸려가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영적 발전을 돕는 것으로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파코미우스 수도원의 근본 원칙은 거룩한 친교였다. 파코미우스 자신은 의도적으로 원시교회의 공동체를 이상으로 삼았다. 형제들을 섬기고 자신의 구원을 향상시키는 것이 모든 행동의 최고 규범이었다. 새로 들어온 사람은 누구나 규칙서의 정신과 파코미우스의 근본 원칙을 늘 마음에 새겨야 했다. 지원자는 문지기 수사에게 신고하고 수도원 문 옆에 있는 손님방에서 며칠을 살았다. 그는 주님의 기도, 20개의 시편, 두 편의 신약성서 편지 등을 외워야 했다. 그뒤 시험을 통과하면 수도복을 받고 수도자가 되었다. 당시 많은 은수자들처럼 성서를 멀리하는 것은 파코미우스 수도원에서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모든 수도자는 성서의 여러 부분을 외워야 했고, 하고 싶지 않아도 읽기를 배워야 했다. 그 밖의 지적인 관심사에 관한 규정도 있었다. 무지와 무식은 파코미우스에게 수도자의 이상이 아니었다. 수도원의 하루 일과에는 성서 읽기와 묵상이 필수 요소였다.

수도자들은 모든 것을 함께 하였다. 모든 수도자가 평등하다는 것, 곧 같은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는 것이 파코미우스 공주수도제도의 기본방침이다. 이는 의복, 음식, 노동, 영적 훈련뿐 아니라 은수자들에게 종종 기이하게 만연된 금욕적 경향(은수자들은 할례를 받고 견딜 수 있을 정도까지 생식기를 조였다)에도 적용되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생활형태는 완전한 무소유와 수도원장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을 전제하였다. 수도자들은 가난하게 살았지만 자신을 책임져야 했다. 이 때문에 삶에 최소한 필수적인 것, 자그마한 움막, 약간의 농기구, 가구를 마련해야 했다. 파코미우스는 수도원의 모든 소유물을 그리스도의 재산으로 여겼으며, 필수품은 그리스도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라 이해하였다.

규칙서에 나타나는 최고의 덕은 순명이다. 순명은 개인의 영웅행위가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고 유지하는 역할을 하였다. 수도원은 각 수도자의 가난으로 부유해지고 맹목적으로 복종하여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는 위험도 안고 있었다. 맹목적 복종에 관한 몇몇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요한 클로보스)는 스케티아로 되돌아가 은수자 생활을 하였다. 그때에 아빠스가 마른 나무조각을 잡아 땅에 심고서는 열매를 맺을 때까지 그 나무조각에 매일 한 양동이의 물을 주라고 말하였다…삼 년 뒤 나무가 살아나 열매를 맺었다. 노인은 열매를 따 집회 때 가져와 형제들에게 「복종의 열매를 받아먹어라」하고 말하였다』

7000여명 입회

파코미우스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새로운 형태의 이 수도제도는 급속히 퍼져나갔다. 곧 타베네시의 수도원이 너무 작아져 일부 수도자는 나일 강 하류에 자리한 파바우로 이주하였다. 다른 수도원들이 파코미우스 수도원 연합에 받아줄 것을 청하였다. 수도원들은-마침내 9개의 남자 수도원, 2개의 여자 수도원(그 가운데 한 곳은 파코미우스의 누이가 책임자였다)-파코미우스의 지도 하에 수도원 연합(거룩한 코이노이아)을 이루었다. 파코미우스가 살아 있을 때만도 그의 수도원에 입회한 수도자가 7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은 곧바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됨으로써, 수도제도는 교회의 구성요소가 되고, 고대 후기와 중세 초기 사회에 확고한 제도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미 술피키우스 세베루스에 따르면 수도원은 교회의 실재였다. 또한 「스승의 규칙서」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집이 교회공동체와 수도공동체에서 실현된다고 보았다.

하성수 박사(한님성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