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은퇴 사제의 삶과 신앙] 대구대교구 김영환 몬시뇰 (12) 계산본당 수석보좌

입력일 2003-09-07 수정일 2003-09-07 발행일 2003-09-07 제 2364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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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상황속에서도 ‘계산문화관’ 완성
주일미사 세 대 이상 집전
십여 년 만에 한국 신부를 만났다가 정들자 이별이라더니, 포항 주임신부로 1년을 지내다가 떠나게 되자, 아쉬워하는 신자들을 두고 계산동 주교좌 본당에 수석 보좌(sui juris) 신부라는 명칭으로 부임하였다. 포항에서도 그랬지만 계산동 역시 본당 신부님이 십여 년이나 오래 계시던 곳이다. 본당의 많은 일들이 한 분 신부님의 습성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풍족하던 대사관에 비해 포항 죽도 본당은 정반대 현실이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재미가 있었다. 「정도 들고 살만한 곳이구나」 하고 느껴질 때 대구 계산동 주교좌 본당에 오게 된 것이다.

계산동성당은 주교좌 성당답게 모든 것이 엄격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1903년에 완성된 쌍종각, 고딕식 건물은 지금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강당과 교리실이 부족했다. 주교좌 성당답게 뚜렷한 강당과 교리실을 갖추어야겠기에 계산문화관을 짓기로 결정이 난 다음, 내가 부임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본당의 모든 초점은 문화관을 짓는데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국내 경제사정이 나빴는데, 그 이유는 월남 파병때문에 들어오던 달러도 전쟁이 끝남으로 인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살아계시는 영향력 있었던 많은 신자들은 박상태 신부님께서 떠나시고 난 다음, 보좌에서 본당신부로 새로 부임한 나에게 경제사정도 나쁘니 문화관 건립은 차후로 미루자고 나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박신부님께서 떠나시면서 문화관 건립을 꼭 성사시키라는 말씀도 있으셨고, 경제사정이야 언제 호전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을 미루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냥 일을 추진하기로 마음먹고 신자들의 협조를 구했다. 적극적으로 호응을 하시던 분들도 있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는 분들도 많았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중단될 일도 아니고 하여 퍽 애를 먹은 기억이 난다.

뼈대만 세우고 내장을 못하고 기다리던 차, 이설억 회장님이 미완성인 건축물이 보기 싫으니 내장은 나중에 하더라도 외장, 즉 유리창이라도 끼워놓자고 제안하면서 자기는 3층 강당을 완성시키겠다고 하였다. 그분이 쓴 돈이라 그 때 얼마나 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문화관 건립 반대가 많던 와중에 이설억 회장님의 제안은 천군만마를 얻은 심정이었다.

쾌히 승낙하고 다음 날부터 즉시 공사를 재개하였다. 수 주만에 3층 강당이 완성되었다. 완성된 강당에서 축하미사를 지내면서 이설억 회장님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했다. 지금도 강당 무대 위에 회장님의 휘호가 걸려 있다.

그 다음 주일 공지사항 시간에 한 분의 도움으로 이렇게 많은 일을 이루었는데, 신자 여러분들이 협심하여 나머지 공사를 마치자고 독려하기 시작했다. 반대하던 분들도 이 회장의 모범을 보아서인지 별말 없이 협조하였다. 그러던 중, 공사 도중 사제관에 불이 났다. 전기 누전으로 사제관 1, 2층이 전부 타버렸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문화관 옆 주방을 빨리 완성시켜서 그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당시 화재보험금을 타서 문화관 건축에 보탰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때 계산성당에서는 1년에 평균 150쌍의 혼인예식이 있었다. 대부분 타 본당 신자였는데, 오래된 계산동 성당에서 혼인을 하고 싶어했고, 또 하객들이 잘 찾아올 수 있다고도 했다. 주일미사는 오전 5대, 오후 4대, 총 9대인데 혼인미사라도 있으면 신부 셋이 평균 석 대 이상을 집전해야 했다.

1년 평균 150쌍의 혼인예식이 있었는데 타본당 신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교리반은 거의 매일 있었고, 연 평균 500명 내지 1000명까지 세례자를 내었다. 그야말로 눈코뜰새 없는 생활이었다. 그때 이문희(바오로) 신부가 보좌주교로 임명되고, 계산성당에서 성성되었다.

또한 당시 군사독재 반대 데모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각 교구마다 주교좌 성당을 중심으로 기도회가 열렸고, 하루도 빠짐없이 많은 성당을 비롯하여 대학교, 예배당 등에서 기도회와 데모로 시끄러웠다. 독재정권 물러가라는 데모로 날이 밝고 날이 저물었다.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도 기도회를 하고 싶었지만 서대주교님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후배신부 두 분이 점심을 먹자고 해서 같이 나갔다가 그 길로 돌아오지 못할 사정에 빠졌다. 내가 없는 사이 그날 오후에 계산성당에서 기도회가 있었고, 그로 인해 전국적으로 규탄을 받던 대구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도 기도회가 한번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계산동 기도회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언급하고 싶지 않다). 그것을 계기로 광주 가톨릭대학으로 발령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