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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명가를 찾아서] (2) 최경환·양업 부자 가문

이승환 기자
입력일 2003-05-04 수정일 2003-05-04 발행일 2003-05-04 제 2346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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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유랑…박해…그러나 신앙만은 꼿꼿
강원도 최초 성당인 풍수원 본당 설립 한몫
‘타 교우 모범’신자로서 책임감 사명감 가득
「프란치스코(성 최경환)의 가족은 이 산골에서 저 산골로 이사 다니면서 그들의 손으로 가시덤불과 돌 자갈밭을 개간하여 연명해 나갔습니다. 그들은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진하여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습니다」(1851년 최양업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中)

한국의 두 번째 신부이며 땀의 순교자라 불리는 최양업 신부와 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아버지 성 최경환. 이들 부자는 당시 유교 이외의 모든 사상이 철저히 배제된 채 사교(邪敎)로 취급받던 천주교를 받아들여 온 몸으로 전파했던 선구자였다.

최경환 성인은 충남 청양, 서울,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평, 안양 수리산을 거치며 교우촌을 만들었고 아들 최양업은 신부가 된 후 조선에 돌아와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해 있는 교우촌을 일일이 방문해 성사를 주고 복음을 전파했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 후 6개월 만에 무려 다섯 개 도 5천리를 순회하며 교우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으며, 이후 장티푸스로 병사하기까지 12년간 교우촌을 일일이 찾아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북 돋우는데 힘썼다.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달했던 18세기 중엽. 최경환·양업 부자는 교우촌의 형성과 발전, 정착에 이바지하며 천주교가 조선사회에 뿌리내리는 데 크나큰 기여를 했다.

그렇다면 그 후손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끊임없는 유랑생활과 박해로 가난을 떨쳐버릴 수 없었으며 이교인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던 후손들이었지만 그들이 지켜내 온 신앙의 결실은 교회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아버지 최경환과 어머니 이성례(마리아)가 순교한 뒤 양업 신부의 동생 의정(야고보)과 선정(안드레아), 우정(바시리오), 신정(델네시포로)은 각각 용인과 진천, 여주, 홍천 등지로 뿔뿔이 흩어진다. 이후 산골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어렵게 살아가던 이들 형제들 중 둘째 의정과 넷째 우정의 후손들이 교우들이 모여 산다는 강원도 횡성의 풍수원으로 와 뿌리를 내리게 된다.

우정의 아들인 최상종

풍수원이 한국의 대표적인 교우촌이자 성지로 자리잡는 데 이바지한 최상종.
가문의 후손 중 가장 눈에 띄는 이는 최양업 신부의 셋째 동생 우정의 아들인 최상종(빈첸시오)이다. 최상종은 당시 풍수원에 모여 살던 수십 여 가구의 신자들을 한데 모아 1888년 강원도 최초의 성당인 풍수원본당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초대 사도회장을 맡은 그는 이후 50여년 간 회장직을 맡으며 풍수원이 한국의 대표적인 교우촌이자 성지로 자리잡는 데 이바지한다.

현재 풍수원에 살며 선산을 지키고 있는 최상종의 손자 현식(75)씨는 『당시 할아버지는 주위 사람들이 강원도의 성인(聖人)으로 부를 정도로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고 회고한다. 그는 할아버지가 항상 미사가 끝나면 교우들을 성당 마당으로 모아 신자로서 지켜야 할 계율을 설명해 주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현식씨는 『할아버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성전을 나와 성당 밖 마당에 교우들을 모았다』며 『하느님의 집을 소중히 보호하고 신부님께 대한 존경을 표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최경환 성인은 전국 방방곡곡에 교우촌을 만들었고 최양업 신부는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교우촌을 가꿔나가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그 후손은 선대가 일궈놓은 노력의 결실을 교회 공동체인 본당으로 승화시켜 나간 것이다.

최상종은 또 최양업 신부 이력서, 송 아가다 이력서, 최 바시리오 이력서 등 총 세 편의 최신부 일가 이력서를 대필·저술해 한국교회사 연구에 큰 기여를 한다. 송 아가다는 최양업 신부의 넷째 동생 신정의 아내이며 최 바시리오는 최상종의 아버지이다. 이 세 편의 이력서는 최신부의 출생지를 밝혀 내는데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조선시대 순교자와 그 후손들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기도 빼 먹으면 지옥행?

최양업 신부의 동생 의정의 증손자인 최기식 신부(원주교구 가톨릭사회복지회 천사들의 집 원장)는 풍수원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최신부는 당시 가족들은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끝나는 하루일과를 보냈다고 말한다.

부모님의 엄한 꾸중도 꾸중이었지만 기도를 거르면 지옥에 가는 줄 알았다고 한다.

『제가 여섯 살 때였던가요. 저녁 무력 깜박 잠이 들었는데 그 사이에 가족들이 저녁기도를 바친 겁니다. 기도를 빼 먹었으니 난 지옥에 갈 것이라며 어머니를 안고 울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최신부는 『「신부가 된다는 것은 천리 만리 길을 가는 것」이라며 사제생활의 어려움과 중요함을 일깨워 준 할머니의 이야기를 평생 잊지 않고 있다』며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며 하루를 보내던 유년시절의 신앙생활이 사제로서 살아가는 큰 힘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양업 신부에 대한 연구가 1900년대 초반에 거의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인지 후손들은 한결같이 최양업 신부에 대해서는 선친에게 들은바가 없다고 증언한다. 다만 당시 복자품을 받은 최경환 성인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한다.

최현식씨는 집안 어른들로부터 『우리 집안은 순교자 특히 최경환 성인(당시 복자)의 후손이므로 다른 교우의 모범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항상 들어왔다』고 말했다. 또 할아버지 최상종은 최경환의 후손인 것은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큰 책임감이자 신자로서의 사명감이 더해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행동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고 기도 때마다 강조했다고 회고한다.

원주지역 교회 이끌어

경주 최씨 관가정파인 최경환·양업 부자 가문의 후손들은 매년 9월 첫째 주일 강원도 풍수원 선산에서 후손모임을 갖는다. 현재 후손들은 원주지역에 대부분 거주하고 있다. 교우촌을 옮겨 다니던 후손들이 19세기 말 신앙의 자유를 얻으며 자리를 잡은 곳이 풍수원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족보를 잃어버려 가문 전체 현황을 알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매년 모임마다 100여명의 후손들이 참석하고 있다.

지난 95년 후손들이 뜻을 모아 새롭게 단장한 선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십자가와 최양업 신부의 동상이 들어서 있다. 또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를 제외한 나머지 가문 선조들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최경환?양업 부자 가문의 직계 후손 중 성직자는 최기식 신부가 유일하다. 다만 최기식 신부의 조카뻘 되는 용섭, 원섭씨가 현재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사제서품을 준비중이다.

외손 쪽으로는 최기식 신부의 조카인 김영진(원주교구)·태진(군종교구) 신부, 최경환 성인의 다섯째 아들 신정의 외가 후손인 신현만 신부(원주교구)가 있다.

매년 9월 첫째 주일 강원도 풍수원 선산에서 후손 모임을 갖고 있는 최경환·양업 부자 가문 후손들.
최상종의 손자 현식씨가 최양업 신부의 동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