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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살리자] (4) 남아선호, 그 부끄러운 자화상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03-04-06 수정일 2003-04-06 발행일 2003-04-06 제 2342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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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딸이라는 이유로 한해 3만명 낙태 추산
개인 가족문제로 치부되는 집단살인
남아선호는 일제잔재 호주제서 비롯
“아들로 대 잇는다” 그릇된 인식 여전
선별임신기술 발전 성비불균형 심화
성범죄 이혼 증가…가정파괴 불보듯
「세 번 죽어야 사는 여자」.

영화나 연극의 제목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현실을 이보다 잘 표현해주는 말이 있을까.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남아선호의 가치관은 현실에서 여성을 세 번 이상 죽이고 있는 셈이다.

가장 먼저 여성들은 아들을 낳기 위해 온갖 수단이 동원되는 과정에서 「작은 교회이며 성소(聖所)」라는 가정에서부터 살해위협을 당한다.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선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 낙태라는 이름으로 지워지기 일쑤다. 근근히 두 번의 살해 위기를 넘기고 태어나도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각종 불평등과 차별 속에서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수없이 세 번째 죽음으로 내몰린다.

이렇듯 남아선호는 단순히 선택 가능한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과도 직결된 문제다. 이런 「남아선호」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의 성차별 관습을 바로잡기 위해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 등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그러나 이런 관련 제도를 운영하는 주축이 남성이라는 점은 여전히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는 곧 성차별 문제가 단지 제도 하나를 만들었다고 쉽게 고쳐질 일이 아님을 대변해주고 있다.

가정에서부터 비롯된 살해 위협에서 간신히 벗어난 여성들 앞에는 거의 예외없이 「사회적 살해」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 전부터 타고난 미(美)에 의해 모든 것을 평가받아야 하고 어렵게 직장을 갖게 되더라도 입사하는 순간부터 정리해고 1순위로 자리매김하기 십상인 것이다.

한 가정의 주인을 알리는 호주의 승계순서를 규정하고 있는 호주제도는 「아들을 낳아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거나 「남자는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낳고 있다. 그러나 전세계에서 한국과 같은 호주제를 가진 나라는 없다. 한국에 호주제를 도입했던 일본마저도 지난 1947년 가족법 개혁으로 호주제를 폐지했다.

여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이상화(테오도라)씨는 『남아선호는 일제가 조선인들을 관리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채택한 호주제에서 비롯됐다』고 밝히고 『이미 도덕적이지 않다고 판결을 받은 호주제의 폐지문제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고 강조했다.

성차별을 낳는 사회적 구조는 비단 호주제뿐만이 아니다. 끝순, 말자, 후남, 말숙, 말순, 종말, 필남 등 주변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여성들의 이름은 우리 사회에 뿌리깊게 남아 있는 남아선호 사상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남아 출생 13.3% 많아

여성계는 한해 평균 전체 여자 태아의 9%에 해당하는 3만명이 뱃속에서 죽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남아선호」로 인해 벌어지는 이런 집단살인으로 낭비되는 사회적 비용만도 연간 320여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지난 10년간(86∼95년) 남자아이들은 여자보다 평균 13.3% 많이 태어났다. 자연상태에서 정상적으로 나타나는 출생성비가 106인데 비해 이 시기에 나타난 출생성비가 113에 이르고 있음에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별다른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출생성비의 불균형은 기가 세다고 알려진 해가 되면 더욱 파행적으로 치닫는다. 호랑이띠, 용띠, 말띠 해였던 86년, 88년, 90년 출생성비는 각각 111.7, 113.8, 116.6으로 평균 출생성비를 크게 넘어서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현실을 개인의 선택이나 가족 문제로 치부해 보다 적극적인 대안 마련에 나서지 않고 있는 정부나 교회의 인식에 있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우리 사회는 자연스럽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사회구조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쉴 새없이 등장하고 있는 선별임신기술은 한국 사회에서 여자아이를 아예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원천적 살해의 가능성마저 내포하고 있다.

아들딸을 선택해서 낳을 수 있다는 한 임신요법의 한국 보급대행회사에 가입한 1300여명의 90%가 아들을 원했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남아선호 사상이 얼마나 뿌리 깊은 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추세대로 계속 성비가 파괴된다면 지금껏 상상치 못했던 심각한 사회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성범죄의 빈발은 물론이고 남자들간의 동성애와 조혼이나 만혼이 유행할 것이라는 게 사회학자들의 전망이다. 이로 인해 이혼율 또한 급속도로 증가해 가정이 파괴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변화를 위한 교회 노력

지난 2001년 6월 발족한 호주제폐지천주교연대는 여성계의 최대 과제인 호주제 폐지운동에 교회가 본격적으로 나선 모습으로 기억될 만하다. 교회 내 여성단체를 비롯해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천주교 사회운동네트워크 등이 주축이 된 이 단체는 교육과 홍보를 통해 신자들 사이에서부터 남성중심 제도의 반생명성을 알리고 사회단체와 연대를 통해 사이버 호주제폐지운동, 민법개정청원 운동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단체가 운영하고 있는 상담전화(02-747-2086)에 호주제로 인한 피해나 불만을 호소하는 신자들의 목소리가 적잖게 접수되고 있는 현실은 남아선호 사상이 교회 안에도 뿌리가 깊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단체 공동대표 하유설 신부(정의구현전국사제단 여성분과)는 『교회제도 안에도 차별적 요소가 적지 않음에도 이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모든 이들의 평등과 해방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정신을 올바로 펼치고자 한다면 교회 내부부터 돌아볼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 양성평등 실천 권오광씨 가족

남편이 빨래 청소 대화로 역할 분담

양성평등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권오광-양은희씨 부부는 무엇보다 부부간의 대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대화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양성평등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가정으로 소문난 권오광(모이세.46.부천 삼정동본당)-양은희(마리아.43)씨 부부가 이름난 비결을 묻는 물음에 근근히 찾아낸 답변이다. 하느님도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듯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말에서 창조적 삶의 실마리를 찾아낸다는 게 이들 부부의 지론이다.

인천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권씨와 서울 영등포에서 구립 어린이집 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양씨 부부는 가정에서뿐 아니라 각자의 일터에서도 양성평등을 실천하고 있는 터라, 더구나 그런 삶이 뿌리내린 지 오래라 특별한 노하우를 묻는 물음이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겨우 찾아낸 별난 점이라야 결혼 초부터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과 가정에서의 역할을 나눠왔다는 것 등이다.

맞벌이 부부라 대화가 부족할 것이라는 염려는 이들 부부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함께 하는 출퇴근길은 둘만의 좋은 대화 공간이다.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땐 첫째 지담(세실리아.14)이와 막내 민혁(이냐시오.7)이가 잠든 후 밤이 늦도록 대화가 이어지기도 한다. 모든 생활의 출발이 가정, 특히 부부간의 대화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빨래와 설거지부터 청소, 민혁이를 놀이방에 맡기고 데려오는 일은 아빠 권씨의 몫이다. 섬세한 여자의 손길이 굳이 필요치 않아 자신이 자청하고 나선 일이다. 물론 이들도 결혼 초기에 육아와 가사문제를 두고 「긴장관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로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나면 긴장이란 있을 수 없죠』

이런 관계를 만드는데는 매리지 엔카운터(ME)나 「선택」 등 교회의 가정관련 프로그램도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했다. 생활이 메마르다고 느낄 때 이런 선택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게 이들 부부의 귀뜸이다.

「각자 계획=지담 : 하루 30분씩 공부하기. 엄마 : 운동 열심히 하기. 아빠 : 민혁이 맡기기…」

냉장고에 붙어있는 「가족회의」 일지는 권씨 가족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한다. 「각자 계획」 「우리 가족의 계획」 「이번 달의 계획」 「서로의 바람」 순서로 기록된 일지는 권씨 가족의 내면까지 읽게 한다. 특별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에게 열린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는 것이다.

이런 가족이기에 성에 따라 역할이 나눠지거나 누구를 더 선호한다거나 하는 분위기는 애초부터 읽히지 않는다.

『올바른 공동체는 평등 개념을 깔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누구를 부리기 쉽도록 하는 지배조직에 불과합니다』

이런 생각에서 이들 부부는 자신들의 삶을 일터에까지 확산시켜 평등부부 모임을 만들어내고 있다.

『교회 안에도 남성선호의 사고가 적지 않습니다. 이를 깨닫고 함께 고쳐 나갈 때 더욱 아름다운 공동체로 거듭 날 것입니다』

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