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교황청 뉴에이지 문헌 해설 - 뉴에이지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성찰 (5) 뉴에이지와 그리스도교 신앙 비교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3-03-23 수정일 2003-03-23 발행일 2003-03-23 제 2340호 8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최면술 등 신비 요법으로 인간이 구원자 역할 수행
뉴에이지의 종교성에서 개별적인 요소들을 전체적인 틀에서 분리해 평가할 수 없다. 그 영지주의적 요소로 인해 뉴에이지는 전체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일부 실용주의자들은 뉴에이지를 단지 마케팅 전략으로 간주하는데 이것은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며 따라서 뉴에이지 운동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들을 엄정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다음은 뉴에이지와 그리스도교의 신앙 요소들을 비교한 것들이다.

인격적 존재로서의 하느님

뉴에이지의 하느님(God)은 애매한 반면 그리스도교에서는 매우 명확한 개념이다. 뉴에이지의 하느님은 비인격적인 에너지이며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거대한 의식(Great Consciousness)이다. 하느님은 세상 밖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 안에 존재하며 만약 자기 자신 밖의 어떤 존재를 하느님이라고 지칭할 때 그것은 조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며 모든 삶의 원천이다. 자신의 생명을 나눠주기 위해 세상을 창조한,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을 지닌 인격적 존재이다. 하느님은 우주의 에너지가 아니라 세상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피조물과 나누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구원으로 이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분이다

뉴에이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수많은 현자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인격적이고 역사적인 예수는 영원하고 비인격적인 우주적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이라며 예수는 유일한 그리스도로 간주하지 않는다.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을 부정하거나 그리스도로서 예수가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을 배제한다.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서가 말하는 나자렛 예수, 마리아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성자, 참된 인간이며 참 하느님, 하느님 진리의 참된 계시,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로 고백한다.

인간은 우주적 존재인가?

뉴에이지의 수련 방법들은 인간이 신비적 상태를 자유자재로 만들려는 것이다. 즉 환생, 영육 분리, 최면술, 주문, 단식, 가사상태, 초월적 명상 등은 이런 상태를 조절하고 체험하려는 시도들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전체 우주와의 거룩한 일치이다. 참된 위험은 뉴에이지의 전체론적인 패러다임이다. 뉴에이지는 전체주의적 일치에 바탕을 둔 사고를 갖고 있으며 여기에 진정한 위험이 있다.

그리스도교는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그 신비가 계시되며 성령의 은총을 통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참된 인간 존재가 된다.

구원은 하느님 은총의 선물

뉴에이지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원죄를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는 펠라기우스주의라고 할 수 있다. 뉴에이지에서 관건은 자기 완성, 자기 실현, 자기 구원이다. 자기 자신이 자기를 구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그리고 어떤 수련 기법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의해 이뤄진다. 원죄와 개인적 죄에 의해 영향 받는 인간의 상황은 오직 하느님의 행위에 의해서만 고쳐질 수 있다.

구원의 길은 단순히 스스로의 변혁이 아니라 자신의 죄, 우리 주위의 사회 안의 죄와 싸움으로써 얻는 죄로부터의 자유에서 발견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의 연대로 이끈다.

진리는 우리가 포용하는 것

뉴에이지에서 진리는 좋은 떨림, 우주적 조화, 일치와 무아의 경지에 대한 것으로 대개 일반적으로 만족스러운 상태를 말한다. 이는 자기가 어떻게 느끼는가에 따라 자기의 진리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종교와 윤리적인 문제를 평가하는 것도 명백하게 각자의 느낌과 경험에 따라 상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의 전체 삶을 그리스도에게 내어주고 그 가르침에 따르도록 요청받는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요구이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