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봉헌생활의 날 특집] 르포 / 봉쇄수도원의 24시 -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03-01-26 수정일 2003-01-26 발행일 2003-01-26 제 2333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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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속 하루 7번의 기도와 노동에 묶인 삶
하지만 내면의 자유 가득한 세상
2월 2일은 봉헌생활의 날
많은 이들은 매일 바쁘다고 한다. 또 많은 이들은 피곤하다고 한다. 아침에 눈을 뜬 시각부터 현대인의 하루는 정신없이 돌아간다. 물질과 쾌락은 넘쳐나고 그 유혹은 더욱 커지고 있다. 삶의 기준은 종종 모호해지고 무엇보다 자신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임을, 이웃 모두가 내 형제자매임을 잊곤 한다. 자신의 전 생애를 온전히 내어놓고 사랑의 삶을 완성하려 노력하는 수도자들. 그들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께로 향하는 모범을 보여준다. 기도 시간이 부족한 현대인들에게 더욱 그러하다.

2월 2일은 제7회 봉헌생활의 날이다. 예수가 성전에 봉헌된 것을 기념하는 이날은 수도자들을 비롯한 봉헌생활자들 뿐 아니라 신자인 우리 모두를 하느님 앞에 다시한번 초대하는 기회이다. 봉헌생활의 날을 맞아 다양한 봉헌생활 모습 중 특히 일반인이 접촉할 수 없고 공개된 적 없는 봉쇄수도원의 삶을 찾아봤다.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삶 안에서 순간순간 하느님 앞에 현존하는 봉쇄수도원의 일상에 들어가본다.

경남 마산시내에서 30분 가량 떨어진 시골마을에 위치한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은 나즈막한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겉모습은 여타의 수도원과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피정의 집 맞은편으로 봉쇄구역이라는 표지판과 함께 두꺼운 철문이 가로막고 있다.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봉쇄구역. 그들이 세상과 분리된 것은 세속의 정신과 영향에서 벗어나 오로지 하느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어렵사리 취재를 허락한 수도자들은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소박한 삶에 하느님이 계실 뿐이라며 조심스레 문을 열어주었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은 성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을 따르며 기도-노동-말씀이 세 기둥 이루는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일상에서는 침묵이 기본이며 하루 7번의 기도가 반복된다. 일상은 365일 동일하다.

새벽 3시30분. 아직은 모두가 잠든 고요한 시각, 수녀들은 미련없이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 성당으로 향한다. 3시50분에 첫기도를 바치고 영적 독서(Lectio Divina)에 빠져든다. 수녀들은 각자 자유롭게 말씀의 숲을 거닐고 묵상한다.

새벽 5시30분. 아침 기도 시간, 어둠 가운데 무릎을 끓고 깊이 허리숙여 인사하는 그들의 모습은 어떤 꾸밈도 없다.

오전 6시30분. 알음알음 모여든 마을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 이 수녀원이 공식적으로 세상과 이어지는 때는 전례와 피정이다. 수녀들과는 비록 격자(나무 울타리)로 분리돼 있긴 하지만 성당은 기도를 함께 나누기 위해 24시간 개방돼 있다.

아침 8시20분. 또다시 기도시간(삼시경). 이후 2시간 30분 가량 작업시간이 있다. 기자는 작업시간을 통해 수녀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대화 도중 종이 울리자 수녀들은 기도시간이라며 조용히 일어섰다. 세상 사람들이 하루 일과 중 가장 바쁜시간,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고 말하는 때마다 그들은 기도를 봉헌하고 있었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듯 보이는 수녀원의 삶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가장 큰 통로는 기도였다. 뜻밖에도 너무나 많은 이들이 수도자들의 기도에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객실 담당 수녀가 보여준 다이어리에는 신자들의 기도 청탁으로 가득했다. 수녀원의 게시판에도 늘 신자들이 보내온 지향을 가득히 붙여놓고 잊지 않고 기도한다. 수녀들은 매일 미사와 기도시간마다 그들의 청원을 대신 빌어주며 고통을 나누려 애쓴다. 수녀원은 세상과 단절된 곳이 아니라 가장 큰 위로를 전해주고 가장 큰 슬픔을 삭혀주는 곳이었다.

오전 11시50분.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기도(육시경)를 바친다. 오후 2시에는 구시경. 이후 오후 작업이 이뤄진다.

오후 5시10분. 하루의 작업을 마치는 시간이다. 저녁기도와 묵상에 이어 식사가 마련됐다.

저녁 7시40분. 끝기도를 바치고 「살베 레지나」의 부드러운 음률 안에서 하루를 접고 대침묵에 빠져든다.

트라피스트 수도회는 스스로의 노동을 통한 생계유지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수녀들은 1~3가지 정도의 소임을 겸하고 있어 작업시간이 늘 빠듯한 편. 부식 등은 무농약, 유기농으로 직접 생산하고 잼과 이콘 등을 판매해 생활에 보탠다. 수녀원 청소 및 식사준비, 잼·이콘 만들기, 재봉, 빨래, 번역, 문서정리, 피정의 집 담당 등 다양한 일들이 분업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수녀원측의 배려로 몇몇 소임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 기자가 찾아간 날 이콘 제작담당 수녀는 마침 마산교구 새 사제들에게 선물할 이콘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작업장이 외부에 있어 겨울이면 온 몸이 꽁꽁 언채로 톱질, 대패질을 한다. 통나무를 작업대로 들어올리기도 벅차보이는 자그마한 몸집에 팔은 온통 나무에 스쳐 상처투성이지만 그는 노동의 무게 속에서 더욱 구체화된 기도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오늘도 작업 도중 수시로 막노동자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길 기도했다. 작은 나무조각 하나들도 그에게 자극을 준다. 살을 깍아내는 칼날을 거부하지 않는 나무. 그래서 나무는 「성화」를 담는 그릇으로 변화했다. 그 나무의 모습을 보며 나 자신은 모난 곳을 깍아주는 하느님을 거부한 적이 없는 지 되돌아보게 된다고.

하느님이 오늘은 특별한 선물을 주시는걸까. 뒷산 오동나무 한그루가 모진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졌다고 한다. 오동나무는 가볍고 결이 고와 이콘 재료로 그만인데…. 얼른 경운기를 끌고가 실어 오고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 잼 만들기를 담당하는 수녀는 오늘도 가장 먼저 노동시간에 들어갔다. 미사를 마치고 작업장으로 내려가 잼 제조기계를 먼저 켰다. 얼마 전까진 손으로 직접 저어가며 잼을 끓였지만 요즘엔 증기솥을 이용하고 있다. 기계 옆에서 혼자 간단한 식사를 하고 삼시경을 바쳤다. 끓이는 것 외엔 모든 과정이 손으로 이뤄진다. 특히 무농약 과일은 일반 과일보다 울퉁불퉁하고 못생겨 껍질을 다듬고 속을 파내는데 몇배로 힘이 든다. 미리 소독해둔 병과 박스, 라벨 등을 준비해놓자 기도를 마치고 온 다른 수녀들이 합심해 잼을 병에 담고 포장하다보면 금새 기도시간이다.

# 주방담당 수녀의 움직임은 우리네 어머니의 일상과 가장 비슷하다. 피정자들의 식사도 함께 마련해야하기 때문에 하루종일 손길이 쉴 새 없다. 오늘 점심엔 원장수녀가 요리당번이어서 신이 났다. 원장수녀의 요리솜씨는 수녀원 내에서 유명하기 때문이다. 메뉴는 항상 가족들의 입장에 서서 짠다. 가끔은 무슨 반찬을 해야할 지 고민이지만 내 가족을 위한 음식을 만드는데 무엇이 힘드랴. 주방담당 수녀는 하기 싫은 일과 하고 싶은 일을 가르는 기준은 「사랑」이라고 말했다.

이곳의 봉헌생활은 고독의 생활과 사랑의 생활, 침묵과 대화, 순종과 자유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내면의 자유를 가지게 한다. 24시간이 오롯이 하느님 앞에 봉헌된 삶. 사회적인 잣대로 잴 때 어떤 대단한 일을 하거나 세상에 큰 도움이 안될 지는 모르지만 주어진 일상에 주어진 작은 일들을 열심히 살아가는 삶을 통해 수녀들은 기도한다. 그 기도를 통해 세상에서 고통받는 누군가가 다시 일어서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기자는 수녀원을 방문하면서 한정된 공간 안에서 정해진 시간에 노동하고 기도하는 일상을 평생토록 반복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짐작해봤다. 그러나 수녀들은 『공동생활과 정해진 시간들은 삶의 제약이 아니라 해야할 일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한다.

숨쉬듯 밥먹듯 자연스런 기도. 「오 예수여」 한마디에 모든 것을 담는 단순한 이 삶을 가득 채운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봉쇄수도원의 일상을 들여다본 일정, 돌아오는 내내 피정의 집 복도에서 본 글귀가 지워지지 않았다.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의 일상은 하루 일곱 차례의 공동기도와 미사, 생계유지를 위한 농사와 이콘.잼 만들기 등의 노동, 영적독서와 묵상 등 단순한 삶으로 유지된다.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