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새해기획 / 희망을 일구는 사람들] 노숙자들의 대모 박숙자 씨

곽승한 기자
입력일 2003-01-26 수정일 2003-01-26 발행일 2003-01-26 제 2333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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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매달 1번씩 먹을거리 선물과 손수 적은 기도문 건네
 “나눌수록 채워지는 신비 확신”
큰아들 가슴에 묻고 본격적인 나눔 시작
한결같은 모습 자활센터 짓는게 꿈
박숙자씨는 노숙자들과의 나눔을 천명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매일 매일 기적을 체험하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

모두가 단잠에 빠져있는 새벽녘.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시간이지만 서울 상도동의 한 주택가 골목은 벌써부터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한 달에 한번 매월 첫째 주 수요일이면 어김없이 이곳으로 모여드는 손님들은 다름아닌 거리의 노숙자들. 족히 100여명은 넘어 보이는 많은 수이지만, 얼굴에는 하나같이 설레임이 가득하다. 이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수십 여분의 기다림 후 마침내 「노숙자들의 대모(代母)」 박숙자(아나다시아.59.서울 상도동본당)씨가 모습을 나타냈다. 유행이 한참 지난 듯한 낡은 옷을 입고 나타난 그의 손에는 손님들에게 나눠줄 달걀, 컵라면, 과일 같은 먹을거리와 돈 2000원이 담긴 선물 꾸러미(?)가 들려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선물. 그들을 위해 손수 적은 기도문이 함께 건네진다.

『제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저들에게서는 악취가 아닌 그리스도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많이 도울수록 딱 그 만큼 채워지더군요. 저는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는 신비를 확신합니다』

노숙자들이 매월 같은 날 상도동을 찾은지도 벌써 10여년 째.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대접해주는 박씨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이제는 당당히 자활에 성공해 선물을 들고 찾아오는 이도 있고, 아주 친구처럼 지내는 인연도 생겨났을 정도로 노숙자들 사이에서 박-숙-자 라는 이름 석자는 참으로 각별하다.

『처음에는 겁도 나고 무서웠어요.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신념과 확신이 들더라고요』

『동네에 거지가 이렇게 득실대니 살 수가 없다』던 주민들도 이젠 박씨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세월을 거치는 동안 수백여명의 자원봉사자가 박씨의 일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노숙자들의 대모」가 지난 1960∼70년대 독서계를 주름잡던 인기작가 「박계형」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박계형은 박숙자씨의 필명. 그는 고려대 영문과 재학 시절 동양방송 개국 기념 현상문예에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이 당선, 당시로서는 초유의 40만부 판매로 독서계에 돌풍을 일으켰던 주인공이다. 그리고 70년대 후반까지 무려 60여편에 달하는 장편소설과 드라마 대본을 썼고, 특히 여고생과 여대생들의 심금을 울리며 큰 인기를 누렸었다. 그리고 1982년, 그는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이민 갔다, 죽었다 하는 소문이 파다했어요. 은둔의 세월을 가진 것은 내 소설에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죠. 제 작품들은 세속적인 명예나 부를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탄생한 것이기에,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었죠』

이상하게도 많이 소유하고 부자가 될수록 정신은 날로 황폐해져 갔다. 정신적 방황은 그를 견딜 수 없는 괴로움으로 내몰아갔다. 기적이 일어난 것은 어느 사순절 새벽. 「나누고 베풀면서 살라」는 미사 중에 들려왔던 그분의 음성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리고 끝없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마음의 평화를 얻은 후, 그는 자신 보다 못한 이들을 찾아 나섰다.

박씨가 본격적으로 자신을 버리고 남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것은 장남 바오로를 잃으면서부터. 큰아들을 가슴에 묻고 다시 한번 삶의 방황으로 비틀거릴 무렵, 집으로 한 무리의 걸인들이 찾아왔다. 어릴 때부터 불쌍한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못했던 바오로. 그들이 바로 주님께서 보낸 아들의 영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박씨의 「베푸는 삶」은 날개를 단 듯 했다. 서울역과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걸인들을 도왔다. 버림받은 노인들과 장애인들은 직접 집으로 데려다 돌보았다. 유럽 성지순례를 떠나서도 그 곳의 집시들과 걸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제대로 둘러본 곳이 한군데도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천명(天命)이었어요. 주님의 도움으로 매일매일 기적이 일어났어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가 있었죠. 남은 삶이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 이상 바라는 것도, 바랄 것도 없다』는 그에게도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 앞으로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가정과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자활 센터를 하나 지을 예정이다. 그는 『사회와 집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기에 그들이 갖고 있는 상처는 생각보다 깊고 크다』며 『이들이 잠시라도 편하게 쉴 수 있는 쉼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찬바람이 사정없이 휘몰아치던 어느 수요일. 100여명의 노숙자를 치르고 난 이날 박씨는 언제나 그랬듯이 서울 명동의 가톨릭회관을 찾았다. 이곳은 과거 강남성모병원의 전신이었던 곳으로, 큰아들은 여기서 태어나고 임종을 맞이했다. 성모상 앞에서 시작된 기도는 오랫동안 계속됐다.

『주님. 제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은 낮은 곳에서 가난한 자와 함께 하는 삶이었나봐요. 벌써 환갑을 바라보는데 얼마나 더 그들과 머무를 수 있을지…. 당신 뜻에 따르겠습니다. 참…. 우리 바오로 잘 있죠?…』

곽승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