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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뉴에이지 문헌 해설 - 뉴에이지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성찰 (6) 뉴에이지와 그리스도교 신앙비교 (2)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3-04-06 수정일 2003-04-06 발행일 2003-04-06 제 2342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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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현상과 영성 혼동 신적인 자신의 능력 강조
고통은 악연이며 스스로 자초한 것‘죄’ 개념조차 없어
기도와 명상 :

자신에게, 아니면 하느님께?

심리학적 현상과 영성을 혼동함으로써 명상 기술이 기도와 혼동되곤 한다. 이런 기술이 기도의 훌륭한 준비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자기 영혼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기법들은 결국 신성에 도달하는, 또는 스스로 신이 되는 자신의 능력을 강조하게 된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잊는다면 결코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아니다.

자기 성찰, 혹은 우주적 에너지와의 융합을 주장하는 한 뉴에이지의 명상은 기도가 아니다. 이는 내적 성찰과 하느님과의 만남이라는 양방향적인 그리스도교 기도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는 단순히 인간적인 노력이 아니라, 회두, 즉 「자기」로부터 「당신」으로서의 하느님께로 비상하는 하나의 대화를 본질로 한다. 그리스도인은 골방에서 홀로 기도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리스도와 일치해 있는 교회의 선익을 위해 성령 안에서 모든 성인들과 함께 기도를 바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뉴에이지에서 「죄」라는 개념은 없다. 단지 불완전한 지식만이 있을 뿐이다. 문제는 특수한 심리적-육체적 기술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의 경지이다. 뉴에이지는 무엇인가를 『믿으라』고 말하지 않고 무엇을 『해라』 또는 『하지 말아라』고 말한다.

그들은 내적 실재를 찾는데 있어서 수천가지의 길이 있고 자신의 지성과 감각이 이끄는데로 그 길을 찾아가라고 가르친다. 권위는 신으로부터 오지 않고 자기 안에 내재한다. 뉴에이지에서 가장 큰 문제는 개인적인 죄가 아니라 우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그것을 치유하는 길은 더욱더 존재 전체 안에 잠기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오직 신적 계시로써만 인간은 죄, 특히 원죄를 인식할 수 있다. 계시를 인식하지 못할 때 죄는 단지 진보에 있어서의 한 결함, 심리적 나약함, 실수, 또는 불충분한 사회 구조의 필연적인 결과 등으로 설명된다.

오직 하느님의 인간 구원의 계획을 알 때에만 우리는 죄가 하느님이 피조물에게 부여한 자유의 남용임을 깨닫는다. 죄는 이성, 진리, 올바른 양심의 훼손이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참 사랑의 실패이다.

고통과 죽음

뉴에이지는 고통을 스스로 자초한 것, 또는 악연, 또는 적어도 자기 능력 계발에 실패한 것으로 간주한다. 뉴에이지에서 환생은 영적 성장의 필요한 요소이며 영적 진화의 한 단계로 간주한다. 이러한 영적 진화라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시작됐고 우리가 죽은 후에도 계속된다.

하지만 우주적 일치와 환생은 인간이 하나의 개인을 독보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그리스도교의 믿음과 결코 조화될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이런 이해는 책임과 자유를 훼손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구원이 왔을 뿐만 아니라 인간 고통 자체가 구원됐음을 안다.

구세주는 인간의 땅에서 인간을 위해 고통을 받았다. 우리는 구원을 성취한 이런 고통에 동참하도록 불리워졌다. 고통을 통해 구원을 가져온 그리스도는 인간의 고통을 구원의 차원으로 들어올렸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고통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세사적 고통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계의 미래는?

뉴에이지는 우주적 법칙들을 통제하는 완전한 존재들을 통해 사람들을 불러모을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에서 그리스도교는 제거되거나 또는 세계 종교와 새로운 세계 질서에 앞날을 양보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항상 깨어있다. 그리스도교의 뉴에이지는 2000년 전에 바로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됐다. 그는 나자렛 예수이며 모든 이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된 하느님의 말씀이다. 성령은 사회와 역사와 민족, 문화와 종교들 안에서 개인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다. 우리는 이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