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새해기획 / 희망을 일구는 사람들] 철도 기관사 이강남씨

곽승한 기자
입력일 2003-01-01 수정일 2003-01-01 발행일 2003-01-01 제 2329호 15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앞만보고 외롭게 달려온 길 125만㎞
돌아보니 언제나 희망 가득했던 길
29년동안 지구 25바퀴 넘는 거리 무사고
수백명 승객 안전하게 모시고나면 “뿌듯”
2003년 새 아침이 밝았다. 가톨릭신문은 새해를 맞아,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며 이 사회의 작은 밑거름이 되고자 노력하는 소시민들을 찾아 그들의 애환과 희망을 담아본다. 함께 하는 이들이 있기에 외롭지 않고, 더불어 살므로써 느낄 수 있는 행복과 평화가 가득하길 기대하면서.

기찻길과 인생은 서로 닮은꼴이다. 오르막 길이 있으면 내리막 길이 있고,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면 곧 밝은 빛이 비춘다. 수많은 고난과 굴곡이 기다리고 있지만, 결국에는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달려야 하는 것. 그것이 기찻길과 우리 인생의 닮은 꼴이다.

철도청 서울기관차 승무사무소에서 근무하는 기관사 이강남(마태오.48.서울 수색본당)씨가 기찻길에서 하루를 시작한지도 올해로 29년째다. 지금까지 그가 달린 거리만 해도 125만km. 지구를 스물 다섯 바퀴 넘게 돈 셈이다. 그간 화물열차에서부터 비둘기호, 통일호 등 열차라는 열차는 모두 거쳤다.

철도기관사는 근무시간이 불규칙적이고 야간근무가 많다. 한 달에 적게는 15일, 많게는 20일 정도 야간 근무를 하게 되며 주말 근무도 허다하다. 특히 좁은 공간에 앉아 장시간 운전을 해야 하기에, 결코 편한 직업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가진 일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는 그 누구보다도 높다.

이 기관사가 처음 기차를 타게 된 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6.25의 상처가 아물 무렵 전북 전주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고교 졸업 후부터 곧바로 철길 인생을 시작했다. 홀어머니를 돕겠다는 생각만으로 선택한 길이었다.

철도 기관사 시험에 합격하고 첫 발령을 받은 때가 지난 1974년. 5년간의 부기관사 생활을 거친 후, 79년부터 본격적으로 기차를 몰기 시작했다. 부산, 대구, 광주, 장항, 대전…. 철로가 놓여있는 곳이라면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다.

『기관사요? 피곤하고 외로운 직업이지요. 하지만 객차에서 풍기는 따뜻한 사람냄새에 어느새 피로를 잊게돼요. 수 백여명의 손님들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시고 나면, 제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져요』

이 기관사는 최근 125만km 무사고 운전 기록을 돌파했다. 97년에는 100만km 무사고 운전의 공로로 대통령으로부터 홍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다. 일찍 입사한 덕분에 동료 기관사들보다 더 오랫동안 기차를 탈 수 있을 것 같다는 그의 말에 천생 철길 인생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 29년째 철도 기관사로 근무하고 있는 이강남씨.

이 기관사는 철길 인생을 시작하던 비슷한 시기에 세례를 받았다.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리던 젊은 시절에는 한 동안 하느님을 잊기도 했으나, 어느 순간 소명 안에서 기쁜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이 기관사는 시간을 쪼개 레지오 활동을 시작했고, 철도청 가톨릭교우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동료 기관사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

『최근에는 지방 출장이 잦은 관계로 열심한 신앙 생활은 엄두도 내지 못해요. 그저 죄송할 따름이죠. 간신히 시간을 내서 주일 미사에 참석하고, 운전석에 앉아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이 신앙 생활의 전부예요』

이 기관사는 『한없이 뻗은 기찻길은 외로운 길이지만, 동시에 희망이 있다』고 강조한다. 눈보라가 쳐도, 비바람이 불어도, 또 길고 긴 터널이 나타나도 우선은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야 한다. 그 구간을 지나면 어스름한 새벽 첫 햇살이 그를 비추고, 곧이어 눈부신 햇살이 기관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굴곡 많은 우리의 인생길과 같다.

『새해 소망이요? 특별한 것은 없어요. 그저 우리 가족들 건강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어려운 사람도 도우면서 살고 싶어요』

특별한 소망 없다고 손을 내젓는 이기관사에게는 그래도 꿈이 하나 있다. 경의선 열차가 복원되면 신의주까지 신나게 달려보는 것이다. 그때까지 꼭 기차와 함께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새해 아침. 오늘도 이기관사는 「희망」을 가득 보듬은 채 철마(鐵馬)와 함께 달린다.

곽승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