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그리스도교 영성사 (94)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입력일 2002-06-30 수정일 2002-06-30 발행일 2002-06-30 제 2305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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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적인 복잡함에 진력 느껴 발생
그루트와 제르송 등이 대표적 인물
23. 근대 영성 (1)

근대 영성(devotio moderna)은 진지하게 영성을 찾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독일과 플란더즈의 사색적인 복잡함에 진력을 느낀 결과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이 경향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과정을 정감적으로 표현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이를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데는 부족하였다. 이들은 영성생활을 보다 실질적으로 접근하려 하였다.

독일과 플란더즈 영성 학교에 대항하여 일어난 이 움직임은 역시 그들의 이론에서 나온 결과가 오류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의심 없이 가끔 잘못 인용되었고 거짓 신비가들의 기만과 이단들로 부당하게 누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게라르드 그루트와 요한 제르송 같은 이들이 위신비주의의 영향을 저지해야 한다고 느낀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현실이었다. 또한 그들은 엑카르트의 가르침에서 단죄된 조항들의 목록을 언제나 지적할 수도 있었다.

이 시대는 전체 교회 안에서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었다. 교황직의 분열,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윤리적인 방종에 이어 신자들 사이에는 가짜 신비주의가 드러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스페인에서는 성 빈첸시오 페레르가 교회의 악한 표양들에 대항하여 강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때는 교회의 쇄신과 교회 조직의 전반적인 점검이 요구된 시대였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여러 가지로 보호받고 있었으나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신학 원리들은 도전을 받고 있었고 전통적인 사상들이 가르쳐지고 있었으나 실천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교는 르네상스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었고 개신교 운동과 트리덴티노 공의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개혁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은 게라드 그루트(1340~1384)였다. 그는 부제로서 주위에 필생(筆生)들을 모았는데 이 단체가 빈데샤임(Windesheim)의 의전사제단과 연관을 맺은 공동생활의 형제들이었다. 그는 자기 단체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이론적으로는 루이스브렉크와 수소의 영향을 받았고 영성적으로는 성 보나벤투라, 카시아노, 요한 클리마쿠스, 성 베르나르도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교회의 쇄신이었다. 그는 성직자들의 윤리적 방종에 심하게 도전하였으므로 교계의 미움을 샀다. 어떤 이들은 개신교 종교쇄신 운동의 선구자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 그의 운동은 교회에 불순종하지는 않았다.

그루트는 사색적 신비주의의 이상한 이론들에 반대한 반면 비지적이고 대중적인 신심을 선호하였다. 그는 일상적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활동이나 관상생활을 분리하는 토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관상이란 사랑의 완성이라는 단순한 이론만 가지고 있었다. 라인란트 신비가들처럼 그가 주장한 것은 영적 청빈, 초탈, 수덕이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완덕의 어떤 유형을 찾는다면 거룩한 모습을 보이신 지상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분의 인성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관상할 수 있고 이는 감각적인 것을 통하여 어떤 영적인 조화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신비적 현상들을 접하는 것에 대해서 그루트는 진실과 거짓을 식별하는 기본적 기준은 열매라고 보았다. 이는 지성과 조명과 애덕의 성장을 의미한다.

빈데샤임회(Windesheim Congregation)의 다른 회원들처럼 그루트는 설교와 영성 강의에 몰두하였다. 그의 문체는 경구적이고 구체적인 증명이나 설명보다는 짧고 구체적인 훈시와 같은 것이었다. 놀랍게도 많은 수도 공동체들이 그루트와 그의 첫 번째 제자이자 공동생활의 형제단의 실질적인 창설자이며 지도자였던 플로렌시우스 라데비즌스(Florentius Radewijns, 1350~1400)의 노력으로 쇄신되고 재조정되었다. 다른 제자였던 게라르트 제르볼트(Gerard Zerbolt, 1367~1398)는 묵상의 방법을 만들었는데 후대 인물이자 무니퀴젠(Munnikhuizen)의 카르투시안회의 원장이었던 앙리 드 칼가르(Henry de Calcar, +1408)와 프란치스코회원 헤르프이 앙리(Henry of Herp)에 의해 작품이 완성되었다. 그 후 묵상의 방법은 요한 몸베르(Mombaer, +1500)에 의해 수도자를 위해 더욱 더 세부적으로 다듬어졌다.

하지만 소위 근대 영성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문필가는 의심할 여지없이 토마스 헤메르켄 아 켐피스(Thomas Hemerken Kempis)이다. 그는 즈볼레에 있던 성 아우구스티노의 의전 사제단 수도회 신부로서 성 아녜스 산(Mount Saint Agnes)의 수련장을 수년간 한 경력이 있다. 일반적으로 그를 준주성범(Imitatio Christi)의 저자로 인정한다. 이 영성 저서는 그가 쓴 수없이 많은 논문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가 쓴 글들은 모두 수도생활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진지하게 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교훈용이라고 할 수 있다. 준주성범과 영혼의 독백(The Soliloquy of the Soul) 같은 수덕적인 글들이 주를 이루지만 게라르트 그루트와 스키담의 성 리드비네의 생애를 기록한 역사적인 글들도 있다.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