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그리스도교 영성사 (92)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입력일 2002-06-16 수정일 2002-06-16 발행일 2002-06-16 제 2303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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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감수성과 열성 지닌 여성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에 봉사
21.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1347?~1380)는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원으로서 신비가이며 아비뇽의 교황청을 원래대로 로마로 옮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염색업을 하던 부모 밑에서 태어난 가타리나는 가정에서 좋은 신앙 교육을 받았다. 7세때 영광에 싸인 예수님을 환시로 보고 동정을 서원하였으며 모친의 반대가 심했어도 서원을 충실히 지키고 도미니코 회원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영성생활에 전력하였다. 10대 말기에 특별한 기도와 고행을 3년간 한 후 21세에 환시를 보게되었는데 그 환시를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의 정배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세 가지 특기할만한 일을 하게 되는데, 첫째 단계는 21세부터 27세까지의 활동이다. 두 번째 단계는 28세부터 31세까지, 마지막 단계는 1년 남짓한 기간이다.

가타리나는 27세까지 시에나에서 지내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수많은 사람들이 성녀의 주위로 모여들고 있었다. 남녀 그리스도인들, 재속 신부와 수사신부들, 평신도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대부분 성녀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가타리나를 『어머니』(원장)로 불렀다.

이렇게 영적 가족을 이루게 되자 이들을 위한 영적 어록이 나오게 되었다. 그것은 성녀의 비서들이 받아 쓴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반대와 중상 모략도 없지 않았다. 젊은 여성이었고 사회적 신분도 없는 약한 여성으로 보였으나 두려움 없이 열심히 일하였다. 피렌체 종교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성령의 인도로 까다롭고 엄한 재판관들을 모두 설득시키고 안심시켰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후 가타리나는 교회의 공무와 정치에 개입하였다. 이를 우리는 지나치게 높게 평가할 것은 아니다. 사실 가타리나는 현실의 문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특히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게 개입하여 교황청을 아비뇽에서 로마로 옮기는데 간접적으로 기여하였다.

영성적으로 가타리나는 신비가들과 교회의 문필가들 대열에 든다. 그녀의 영성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예민한 감수성과 열성 그리고 사랑이 많은 여성이었다. 그리하여 강생하신 말씀을 사랑하고 그분께 어린 나이에 동정 서원을 발할 정도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였다. 특히 죽을 때가지 비밀리에 간직한 거룩한 흔적(聖痕, stigma)과 신비적 일치의 반지는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에게 고통을 주실 때가 많다. 이는 성인들의 생애에서 많이 드러나는데 가타리나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랑은 그분이 세우신 교회와 교회를 지도하는 이들의 열성과 생활 개선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가타리나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일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 중심적 영성은 하느님의 창조적이고 구속적인 사랑으로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피와 물을 다 쏟으셨고 당신 사랑의 표시로 교회에 남기신 성체성사에 집중하게 된다. 가타리나의 생애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헌신적인 사랑을 배웠고 하느님께 사랑은 물론이고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봉사하였다.

또한 건전한 교리와 영성의 가르침을 받았다. 마지막 지도신부는 도미니코회 수사신부이자 복자가 된 카푸아의 라이문도였다. 또한 가타리나는 성 아우구스티노와 베르나르도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신을 이어 받았으므로 건전한 신비가였다. 하느님의 섭리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는 「대화」는 전적으로 하느님 사랑,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에 대한 사랑, 인류의 구원과 평화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의 생활 개선과 개인의 성화를 다루고 있다. 그만큼 교회의 사람으로서 개인의 성화뿐 아니라 교회 전체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정신에서 구원의 표징인 교회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정신이 깔려 있다.

영성의 극치는 사랑의 완성이다. 가타리나는 사랑의 단계를 세 가지로 표현하였다. 첫째는 두려운 사랑이자 비굴한 사랑이다. 이는 각자가 지은 죄로 인해 받을 벌을 두려워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므로 가장 낮은 단계의 사랑이다. 그 다음 단계는 영원한 상급을 받으리라는 보상에 대한 사랑으로 진보된 사랑이긴 하나 완전하지 못하다. 완전한 사랑의 단계는 사랑이신 하느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은 자신의 의지나 사랑(自愛)을 버리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모든 것을 맡기는 완전한 사랑의 행위를 하게 된다.

가타리나의 신비적 일치는 복잡하지 않다. 하느님의 현존을 자신 안에서 체험하고 인식할 때 언제나 마음을 그분께 들어올릴 수 있다. 성 아우그스티노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 안에 깊숙이 들어가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발견된 하느님을 더 원하는 영혼은 완덕의 극치를 향해 늘 그분과 일치된 삶을 사는 것이다.

가타리나는 1380년 4월 29일 귀천하고 1461년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다.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