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그리스도교 영성사 (90)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입력일 2002-06-02 수정일 2002-06-02 발행일 2002-06-02 제 2301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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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시오 영성학교 대표는 엑카르트
의지보다 지성 강조…신비주의 경향도
20. 디오니시오 영성 (1)

이 영성은 다른 말로 「라인란트 신비주의」 영성이라고 하므로 다소 설명이 필요하다. 이 지역은 독일의 라인강 서쪽 지방에 있다. 여기서는 독일계 도미니코회원들이 신플라톤 사상(네오플라토니즘)에 의한 아우구스티노 영성을 부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고 네덜란드와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이 움직임은 어떤 면에서 지적인 면을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지적인 전통에서 위디오니시오의 신비적이고 관상적인 영성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 것이다. 이 영성은 라틴계 나라들로부터 독일과 앵글로색션 나라들로 영적인 영향이 이동됨으로써 영성 학교가 각 나라와 기질에 따라 뚜렷하게 발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새로운 영성 학교의 지도자는 독일의 도미니코회원이었던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였다. 그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서 출발하여 지나치게 신비주의로 나아가다가 범신론적 경향에 빠져 교회로부터 단죄를 받았다.

이 영성이 출현하여 성공을 거둔 배경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성 토마스와 성 보나벤투라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신비적 관상에 대하여 훌륭하게 신학을 전개하였지만 14세기 이전까지는 이들의 작품이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이 널리 보급된 큰 원인 중의 하나는 열성적이고 교육을 많이 받은 여성들의 출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깊은 기도를 통하여 여러 가지 신비 체험들을 하면서 합당한 영성 지도자를 찾고 있었다.

이 시대의 라인강 계곡은 영적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 중의 어떤 이들은 적절한 통제를 통하여 올바른 길로 나아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러한 영적 운동은 신비 체험에 대한 심리적이고 서술적인 논문들이 나오게 된 길을 제시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리하여 후대에 등장한 예수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그리고 수많은 스페인의 영성가들을 배출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 사실, 독일과 저지대 신비가들의 활동은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과 같은 스페인 영성 저술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 다른 요인은 주로 독일계 도미니코회원들이 성 토마스의 신학 전개 방식보다는 성 대 알베르토와 네오플라토니즘의 학설을 선호한 데 있었다. 그들 중에는 스트라스부르그(Strasburg)의 휴그(Hugh)와 울리크(Ulrich), 프라이부르그(Freiburg)의 티에리(Thierry)가 있다. 14세기 가톨릭적 영성이 그리스도인생활과 완덕의 삶에 있어서 신비적 요소로 강하게 기울자 신플라톤적 접근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변적 접근을 시도한 성 토마스의 방법보다 표현과 서술에 있어서 더 적절한 것처럼 보였다.

중세기 영성은 명백하게 관상과 신비적 체험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떤 수행적인 방법이 제시되었다. 그것은 전적인 자기 포기,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기, 그리고 모든 감각적 상을 끊어버리는 것이었다(심지어는 그리스도의 인성까지도 여기에 포함시켰다).

그들은 이런 방식이야말로 영혼과 하느님 사이의 긴밀한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반면에 14세기의 저술가들은 정확한 언어로 영적 체험을 기술하지 않았다. 그러나 16세기와 그 다음 세기들의 저술가들은 이들과는 달리 정확한 언어로 기술하였던 것이다.

14세기 영성의 배경을 상세히 조사해보면 어떤 인물들의 부상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디오니시오 영성 학교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그들 중 가장 영향력이 있고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엑카르트이다. 그는 유명한 설교가이자 신학자였으며 도미니코 수도회 안에서는 여러 가지 중요한 행정업무를 맡기도 하였다.

그는 라틴어와 독일어로 글을 남겼지만 불행하게도 그 작품의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19세기 초반까지는 출판할 엄두도 못내다가 그 이후에야 가능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정통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해하기 힘들다. 비록 그의 작품이 다소 비판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그의 의도는 언제나 전통 안에 머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신비 사상이 다소 이상한 신비주의로 흘렀고 범신론적인 면이 보였으므로 곧고 비타협적인 그의 성격으로 보아 제도권과 마찰이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신학자로서 엑카르트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그러므로 의지보다는 지성의 우위를 강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그는 아베로에스와 위디오니시오의 학설에 지나치게 심취하였고 성 베르나르도의 강론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신비 체험에 기울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르가레트 뽀레나 막데부르그의 메키틸트처럼 영혼의 무와 절대적인 초탈 정신과 무아 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존재의 신비주의와 신비적 혼인의 영성에 입각한 영성생활의 신학을 전개하게 되었다.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