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그리스도교 영성사 (89)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입력일 2002-05-26 수정일 2002-05-26 발행일 2002-05-26 제 2300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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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너무 중시 … 세 수도회로 갈라져
성 보나벤트라의 학문·영성 업적 지대
19. 프란치스코 수도회 영성 (2)

성 프란치스코는 1226년 10월 3일 지상의 삶을 거룩하게 마치고 귀천하였다. 그러자 10년이 지난 후 규칙을 개정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가난 서원을 엄격히 지키자는 회원들과 완화하자는 회원들로 갈라지게 되었다. 가난을 엄격히 지키자는 소위 「영성파들」은 1257년부터 1274년까지 총장을 지낸 성 보나벤투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난을 수도회와 교황께 대한 순명보다도 더 위에 놓고 고수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애덕보다도 가난을 더 중히 여기고 있었다. 이리하여 장기간 가난의 서원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자 1909년 교황 비오 10세는 교황 서한을 발표하여 성 프란치스코의 후예들을 세 수도회로 나누는데 인정하였다. 이들은 작은 형제회(O.F.M.)와 꼰벤뚜알(O.F.M.Conv.)과 카푸친(O.F.M.Cap.)으로 갈라졌으나 이들 모두 프란치스코 성인을 동일한 창설자로 모시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의 초기 이상이 다소 변형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설교의 사도직과 탁발 수도회의 고수이다. 수도자들은 초기부터 창설자의 모범을 따라 순회 설교자들이었다. 설교자들에게는 기본적인 학식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들은 창설자의 뜻에 따라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그 후 수도자들은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자 교구 사제들의 반발이 심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파리 대학교 옆에 집을 마련하여 기거하면서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다시 교구 사제들의 심한 공격을 받았으나 성 토마스와 성 보나벤투라의 덕분으로 수도자들의 신분은 인정을 받았고 교황청의 도움을 받아 교황 알렉산데르 4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들의 학문 연구는 성 보나벤투라, 빠도바의 성 안토니오 그리고 요한 둔스 스코투스 등 위대한 학자들에 의해 고조되었다. 이들 중에서도 보나벤투라 성인은 레오 13세의 표현처럼 『신비가들의 왕자』라는 칭호만큼 그의 학문적 업적은 위대하다. 그를 일컬어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제2의 창설자라고도 한다. 그만큼 그의 영성적 업적은 지대한 것이다. 그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들은 서로 차이점이 많았으나 서로 가까운 친구였다. 그들의 신학 접근 방식도 달랐다. 성 토마스가 주지적이고 분석적이었다면 성 보나벤투라는 주의적이고 신비적이었다.

성인에 대하여 위대한 현대 신학자 이브 꽁가르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성 보나벤투라에게 있어서 신학은 은총의 산물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소통의 결론처럼 여겨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성 보나벤투라에게 있어서 신앙과 나타남 사이에 있는 것이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신학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순수 지적인 선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죽은 신앙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의한 살아있는 신앙이고 덕행의 실천이며 하느님과 사랑의 일치를 위한 염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 토마스의 신학이 성 보나벤투라의 신학과 다른 점을 알 수 있다. 성 토마스는 신학을 신앙의 확신에 대한 성장으로 본다. 이 확신들이 인간의 이성과 합치하여 지식의 체계로 세워진다. 신학도 다른 모든 것처럼 하느님의 섭리하심으로 성장 발전하여 초자연적 신앙 안에 뿌리를 내리게 되나 그것은 엄격히 말해서 이성적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다른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성 보나벤투라의 업적은 베드로 롬바르도의 명제론을 주석한 데 있다. 성인이 쓴 업적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 작업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의 학설의 기본적 성격들은 할레스의 알렉산데르와 성 아우구스티노의 학설을 따른 전통에 있다. 그의 학문적 작업은 수도회 창설자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으로 들어가 세라핌 천사와 같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직관하고 그것을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권위에 순종하였고 신학자들을 존경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였고 늘 조용하고 평정된 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삶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실천하였고 뛰어난 학구심으로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온화한 성품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성인의 영적 학설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그는 이 점에서는 성 토마스와 일치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강생의 목적은 구속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의 중심이시다. 그리스도인 영성의 기초는 겸손에 있다. 그리스도인 완덕의 본질은 애덕이다. 이는 지혜처럼 완성되는데 신비적 은총들과 연관이 있다. 관상은 사랑과 지혜의 완성이다. 이는 보는 것보다는 하느님을 정답게 체험하는 데 있다. 이는 온전히 수동적이며 어떤 형태의 탈혼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성 보나벤투라는 월등히 뛰어남(excessus)이라고 하였다.

성 보나벤투라는 수도회를 창설자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에 따라 쇄신하기 위하여 일생동안 사부의 정신에 따라 살았다. 복음적 권고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특별히 가난의 정신을 강조하였고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설교하고 고해성사를 주며 관상 생활을 통하여 완덕에 이르려고 노력하였다.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