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차동엽 신부의 새시대 교회가 나아갈 길 (4) 인간성 구현을 지향하는 복음화

차동엽 신부(인천교구 사목연구소 소장)
입력일 2001-12-23 수정일 2001-12-23 발행일 2001-12-23 제 2280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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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
복음처럼 애매한 것이 없다. 사람과 기준에 따라서 저것이 「기쁜 소식」일 수 있고 이것이 「기쁜 소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복음화처럼 다의적(多義的)으로 사용되는 단어도 별로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복음화」의 이름으로 투쟁을 불사하고 어떤 이는 복음화의 이름으로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복음화」의 일환으로 해방신학이 생겨났고 「복음」의 이름으로 그 해방신학이 단죄되기도 하였다. 똑같은 「복음」을 전파한다는 명목을 내세우면서 수많은 노선과 종파와 교파들이 갈려서 서로가 서로에게 등을 지고 고발하고 파문(破門)한다.

지난 세기 말엽부터 이러한 사태(事態)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들이 복음화의 본질적 의의(本質的 意義)를 묻는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다 : 복음(화)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가? 이 물음이 도화선이 되어 사람들은 복음화가 궁극적으로 인격의 완성 곧 인간성(humanity)의 구현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에서 복음화에 대한 분분한 시각들과 입장들을 하나로 묶어줄 공통분모를 발견하기 시작하였다.

다원화(多元化)와 분화(分化)의 성향이 점점 뚜렷해져가고 있는 21세기에 교회가 우선적으로 역점을 두어 실현해 나가야할 비전 가운데 하나가 바로 20세기 교회가 애써 열어놓은 복음화의 새 지평을 확장·심화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다음의 세가지로 구체화된다.

첫째 복음(화)의 본래적 의미와 실질적 내용을 성찰·확인하고 회복·구현하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복음은 인격의 궁극적인 완성, 인간성(humanity)의 구현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복음화는 『기쁜 소식을 인류의 모든 계층에게 전해 주어 그 힘으로 인류를 내부에서부터 변혁시켜 새롭게 하는 것이다(현대의 복음선교, 18항)』 태초에 원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인간 본래의 존재 의미를 회복시키기 위해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저 주신 선물이 바로 「기쁜 소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화의 이름으로 교회가 그 동안 기울여온 노력들이 이러한 복음화의 근본 의미를 제대로 실현해 왔다고 할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대답은 긍정적이질 못하다. 신·구교를 통틀어 그리스도인이 국민의 세 명당 한 명 꼴인 1000만명이 넘은 지 오래지만 인심은 더 각박해지고 인간성은 더 실추되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교파들마다 경쟁적으로 자기 식의 교리들을 가르쳐서 교조화(敎條化)된 종교인을 양산(量産)하는데 주력한 나머지 정작 인격의 수양이나 잃어버린 인간성의 회복에는 별반 기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세 확장에 치중한 종래의 복음화 노력이 지니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이제라도 교회는 예비신자 교리와 세례 후 계속교육에 '인성계발'과 '영성교육'을 강화하여 질적인 보완을 꾀해야 할 것이다.

둘째 복음화에 대한 총체적(holistic)전망을 견지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 자체가 총체적이고 인간의 삶 자체가 복합적인데 비해 그 인간성의 구현을 지향하는 복음화의 노력은 지나치게 편향적이거나 축소·왜곡되는 경향이 있었다. 교회는 『복음화의 풍부하고 복잡하고 역동적인 참모습을 부분적 또는 단편적으로 규정할 때는 그것을 빈약하게 하거나 왜곡시킬 위험이 있다(현대의 복음선교, 17항)』는 사실을 명심하고 그 「전체성(현대의 복음선교, 28항)」을 살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민족과 문화를 아우르는 「대상적인 총체성」과 외연(外延)과 내실(內實)을 통합하는 「질적인 총체성」, 그리고 선포(마르 16, 15), 가르침(마태 28, 19), 증거(사도 1, 8), 성사(마태 28, 19 루가 22, 19), 이웃사랑(요한 15, 12) 등을 총동원한 「방법론적 총체성」을 견지해야한다(졸저 「공동체 사목 기초」참조).

셋째 인격완성을 지향하는 교회 밖의 모든 노력들에 대하여 열린 자세로 대화와 연대를 모색하는 것이다. 복음에 충실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용어나 노선을 달리하는 이들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부질없는 열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고집하다가 원수를 만드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예수를 박애를 실현하다가 억울하게 십자가 죽음을 당한 한 훌륭한 분」으로 알고 존경하도록 유도할 줄 아는 유연함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굳이 「천국」이라는 단어를 고수하다가 반감이나 일축을 사느니 오히려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요한 묵시록 21, 4)』 나라를 소개하여 호감을 불러일으킬 줄 아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요컨대 어느 누구도 어떤 교회도 「복음」과 「복음화의 재량권」을 독점할 수 없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이 복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차동엽 신부(인천교구 사목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