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유박해 순교자들 (35) 원 야고보

김길수 (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입력일 2001-12-02 수정일 2001-12-02 발행일 2001-12-02 제 2277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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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덕행 실천’모든 이 칭송
금요일마다 금식 … 전교 전력
상처투성이 육체 광채에 둘러싸여
원야고보는 1793년에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의 사촌형이다. 그들은 홍주(洪州)고을 응정리(鷹正里)에서 같이 살았으며, 같은 시기에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받아들였다. 원야고보는 성격이 어질고 순하며 곧고 활달하였는데, 그 좋은 바탕에 신앙까지 받아들이자 온갖 덕행을 실천하여 모든 이의 칭송을 받았다.

그는 신자가 되면서 자기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쓰기로 맹세하고 실제로 자선 실천을 일과로 삼았다. 그러면서 자신은 매 금요일마다 금식했다. 무엇보다 천주교 전교에 전력을 다하며 주일과 축일에는 음식을 많이 장만하여 모든 사람을 청해 먹게 하였다. 사람들이 모여 즐겁게 음식을 나눌 때면 『오늘은 주님의 날이니 거룩한 기쁨으로 이 날을 지내야 하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산을 나누어줌으로써 그 분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라고 하며 천주교의 여러 가지 교리를 설명할 기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의 열심한 신앙생활이 널리 알려지자, 1792년 관장이 그를 체포하도록 포졸을 보냈다. 이때 그는 피신에 성공하여 위기를 면했으나 그의 사촌인 원베드로는 체포되어 그 이듬해에 순교하였다. 원야고보는 사촌의 순교소식을 듣고 그도 순교할 열망을 품고 더 이상 피신함이 없이 공공연히 기도와 신심행사를 행하기 시작했다.

사또가 자신을 잡아가기를 바라면서 그는 더욱 열심히 그의 신앙을 드러나게 고백했으나, 어쩐지 포졸들은 그를 보고도 내버려두었는데 그 때 주문모 신부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즉시 신부를 찾아가 성사 받기를 간절히 청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교회에서는 여자 둘을 데리고 사는 사람은 누구나 배척하니 즉시 여기서 나가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거절했다. 원야고보는 나와서 사흘 밤낮으로 울고 탄식하며 음식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신부께 가서 이 사실을 알리자 신부는 그를 다시 들어오게 하고 다짐을 받았는데, 원야고보는 『참말이지 저는 천주교회 법으로 아내와 첩을 가지는 것이 금지됨을 몰랐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알게 되었으니 돌아가 즉시 첩을 보내기로 약속합니다. 제발 성사를 주십시오』그는 성사를 받고 돌아가 여인에게 말했다. 『천주교인은 첩을 둘 수도 없고 또 첩이 될 수 없다』그리고는 그녀를 보냈다.

원야고보는 순교자 박취득 라우렌시오와 절친한 사이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 만나 덕행을 닦고 순교할 것을 다짐하며 서로를 격려하였다. 그러던 중 1798년 덕산(德山)에서 포졸에게 붙잡혀 옥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덕산관아에서 심문이 지연되자, 그는 관장에게 심문을 하든지 아니면 석방하라고 용감히 독촉하여 "나는 하느님을 섬기고 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천주교를 믿고 봉행(奉行)합니다"라며 주리를 틀리고 매를 맞으면서도 한결같은 신앙을 고백하였다. 원야고보는 홍주의 진영(鎭營)으로 이송되어 무서운 고문을 받았고, 다시 덕산으로 보내져 거기서 두 다리가 완전히 부서지도록 몹시 맞았다.

마침내 감사의 명으로 그는 충청도 병사(兵使)가 머물고 있는 청주(淸州)로 압송되었다. 그가 떠나던 날 그의 아내와 자식과 친구들이 울면서 따라왔다. 그는 그들을 가까이 오라고 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할 때에는 인간 본성의 정을 따르지 말아야 하네. 모든 고생과 고통을 잘 참아 받으면 우리는 기쁨 가운데에 하느님과 착하신 동정마리아 곁에서 서로 만나게 될 것이네. 자네들이 여기 있으면 내 마음이 흔들리고 내게 매우 해로울 수 밖에 없네. 그러니 제발 이성(理性)을 따라 내 앞에 나타나지 말게』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런 다음에 전에 그의 첩이었던 여인이 사람을 보내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기를 청하였는데, 원야고보는 『왜 내 대사(大事)를 그르치게 하려는가!』하고 그 청을 거절하였다.

청주에서 심문을 당하였다. 영장(營將)은 그를 살려 주겠다고 약속하며 배교시키려 했으나, 원야고보는 『저는 9년째 천주교를 위하여 순교하기를 원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는 이 마지막 결의에 찬 고백을 한 후 하루종일 가해지는 혹독한 형벌을 받았고,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한달 동안을 태장(苔杖), 주장(朱杖), 곤장, 주리 등 온갖 종류의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주님께서는 원야고보의 그 장한 결의를 이루어지게 하셨으니, 1799년 3월 13일 장하치명(杖下致命)으로 순교하게 되었다. 그가 순교할 때 70세였으며, 그가 죽은 후 상처투성이인 육체는 이상한 광채에 둘러싸인 것 같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기적을 목격하고 거의 50여 가족이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 순교자의 생애는 아직 일반에 소개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순교선열을 기억할 때에 얼마나 많은 거룩한 순교자의 모습이 그 안에 감추어진 채 그대로 있는지 참으로 탄복할 일이다. 오직 주님만이 그들의 참된 갚음임을 거듭 놀랍고 은혜롭게 느낀다.

김길수 (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