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유박해 순교자들 (34)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김길수 교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입력일 2001-11-25 수정일 2001-11-25 발행일 2001-11-25 제 2276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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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망높고 신심깊은 양반 출신
사제영입 앞장선 호남의 사도
부인 아들 동생 조카 며느리 마저도 순교
전주의 초남에서 살았던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1756~1801년)은 양반집안 출신으로 덕망이 높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는데, 그 외에 재산이 많아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1791년 제사문제로 공식적인 사형집행으로 순교한 한국교회의 첫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의 이종사촌이기도 한 그는 사촌인 윤지충에게서 교리책을 빌려보고 관심을 가졌다. 유항검은 천주교 교리에 대해 더욱 깊이 알아보고자 하여 양근의 권일신을 찾아가 배우고 입교하여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집으로 돌아와 많은 가족들을 가르쳐 신자가 되게 하고, 친구와 이웃에게도 열정을 다해 교리를 전하였다. 그의 영향력과 한결같은 열성과 모범적인 신앙생활은 그로 하여금 반도의 남쪽 호남지역의 반석으로 인정받게 하여 우리는 그를 호남의 사도라 부른다.

그의 사도다운 면모는 그의 가족들이 천주교로 인해 참수 당한 모습에서도 충분히 볼 수가 있다. 우선 그의 동생인 유관검은 그와 함께 같은 날인 1801년 10월 24일에, 그리고 며느리인 이누갈다와 함께 동정부부 순교자로 유명한 장남 유중철 요한과 차남 유문석은 1801년 11월 14일에, 부인 신희와 조카 유중성 마태오, 옥중서간으로도 널리 알려진 며느리 이순이 누갈다 등은 1802년 1월 31일에 각각 순교하였다. 참으로 온 집안이 다 얼마나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는지 짐작이 될만하다.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없이 자생적으로 시작한 명례방 김범우 선생 댁의 집회가 바로 그 이듬해인 1785년에 형조에 의해 발각되어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인 소위 을사추조적발 사건이 일어 났다. 한국교회는 그 첫 싹부터 잘리는 박해를 받아 집회는 해체되고 유림의 거센 반발 속에 버려졌다.

이러한 어려운 때에 권일신, 이승훈, 정약용 형제 등이 1787년경 교회재건운동을 벌이면서 평신도에 의한 임시 교계제를 설정하였다. 아직 교계제에 대한 교리 지식이 부족했던 그들은 스스로 사제직을 수행하기도 했는데, 이 때 유항검도 신부로 임명받아 동참했다. 고향인 전라도에서 설교하고 세례도 주고 고해와 견진성사를 집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리공부를 통해 이러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의심을 품게되어 북경 주교께 문의하여 잘못임을 알고는 즉시 중단하고 평신도로 돌아가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이 무렵 제사문제에 대한 북경의 회답도 있어 당시 많은 양반신자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교회를 떠났다. 아직 신심이 깊지 못한 상태에서는 당연히 현실적 문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항검은 이러한 난관 속에서 용기와 믿음을 잃지 않고 복음전파에 힘쓰며 윤지충과 함께 교리 공부에 더욱 충실하였다.

초기교회에서는 이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사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어렵게 전개한 사제영입운동이 성공하여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게 되었다. 유항검은 더욱 용기를 얻어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전라도 지방을 순회 사목하는 신부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직접 보좌하였다. 엄중하게 비밀을 지키며 온갖 제약 속에 활동하던 그는 마침내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가장 먼저 체포대상으로 지목 받아 1801년 3월에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감사는 지방의 토호로 명망과 세력을 지닌 유항검을 다루기 위해 더욱 위엄과 절차를 갖추어 준엄한 심문과 고문을 했다. 유항검은 서양인을 청해오는데 비용을 부담했으며, 외국인을 입국시켜 자신의 집에 묵게 하고 사도를 널리 전했다는 점에 대해 심문을 당하고, 특히 서양의 선박을 초빙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 했다는 소위 대박청래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고문을 당했다.

유항검은 서울로 압송돼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그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양선박을 초빙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서양과 우리나라가 친교를 맺음으로써 새로운 문명의 혜택을 받아 우리도 남과 같이 잘살아 갈 방도를 취하려고 한 것이며, 이렇게 되면 조정에서도 천주교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어 탄압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조정에서는 의심과 경계를 풀지 않고 유항검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다.

한때 그가 곤장을 맞고 성교의 신봉을 구태여 고집하지는 않았다고 하여 결코 그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의 생애와 교회에 기여한 업적과 가족들과 그 자신의 순교는 오히려 그의 굳건한 신심을 의심할 수 없게 한다.

유항검은 수렴청정하며 박해령을 내렸던 김대비의 주장에 따라 호남인들이 천주교를 신봉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기 위하여 전주감영으로 보내져 전주성 내에서 참수되고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에 따라 호남의 사도 유항검은 옥중서간과 동정부부의 순교로 너무도 유명한 그의 며느리의 간절한 옥중기도 속에 1801년 10월 24일 사십 육세의 나이로 능지처참되어 자신의 한 때의 나약을 피로 씻는 순교의 영광 속에 주님께로 나아갔다.

김길수 교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