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유박해 순교자들 (32) 이희영 루가

김길수 교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입력일 2001-11-04 수정일 2001-11-04 발행일 2001-11-04 제 2273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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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견도 그린 한국 첫 서양화가
상본 성화상 그리며 교회 봉사
남아있는 작품 귀해
서소문 밖에서 참수
조선후기 천주교의 전래는 전통사상에 대한 가톨릭사상의 도전으로 문화사적으로도 일대 충격을 일으켰다. 가톨릭사상은 전통사회의 사상적, 사회의식적 측면에 충격을 주었으며, 가치관 등 사회문화 전반에 서구문명과의 접촉기회를 갖게 하였다.

단적으로 예술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한국 국악의 음계는 궁 상 각 치 우였는데, 가톨릭 성가가 도입되면서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의 서양 음계가 도입되었다. 천주교 성당이 건립되면서 최초의 서구식 건축양식이 도입되었고, 성전 장식과 성물 등의 도입을 통해 조각, 조소 등에도 서구양식이 도입되었다.

이런 가운데 그림에도 서양화 양식이 도입되었는데 이 무렵 한국근대미술사가 시작된다. 한국근대미술사가 시작될 무렵 서양화 양식의 도입은 역시 천주교의 성화상과 상본 등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천주교의 성화상과 상본 등을 통한 서양화 화법은 종래 한국의 전통 미술에서 볼 수 없었던 원근법과 투시도법의 기법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 때 서양화법을 받아들여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양화를 그린 분이 이희영(李喜英 루가, 1756~1801)이다. 그는 경기도 여주지방 사람으로 호를 추찬(秋餐)이라 하였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帛書) 중에서 이희영에 대해 이렇게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희영 루가는 요사팟의 아주 가까운 친구인데, 처음에 여주에서 살다가 뒤에 서울로 이사하였다. 그는 본래 화공(畵工)으로 성상(聖像)을 아주 잘 그렸는데 역시 참수 당해 순교하였다』

여기서 요사팟은 김건순을 말한다. 김건순은 이희영의 7촌 되는 인척으로 이희영의 가족들이 오랫동안 김건순의 집에서 부쳐 살았었다. 그러나 이희영의 동지로 강이천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교리를 함께 듣고도 입교하지는 않았다.

본래 강이천, 이희영, 김건순 등은 나라와 겨레를 위한 의협심이 강한 사람들로 1636년 병자호란 때에 청나라에 굴복하여 맺은 굴욕적인 맹약에 대해 의분을 지니고 그 원한을 씻기 위해 바다의 한 외딴 섬으로 들어가 군사를 기르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소위 해도병마(海島兵馬)의 계획은 1797년 탄로가 나서 김건순은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고 강이천은 유배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주문모 신부는 이런 계획을 듣고 이런 세속적인 계획보다 참된 진리를 신봉하고 보다 높고 크게 백성을 위해 봉사하라고 권고하였다. 이희영은 입교하기로 결심하고 신부님을 뵙고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히고, 앞서 세속의 동지들과 계획했던 해도병마 계획을 포기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1799년 주문모 신부로부터 루가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영세한 후 이희영 루가는 세속의 벗들을 멀리하고 정광수 발라바, 홍익한 안토니오, 황사영 알렉시오 등과 같은 열심한 교우들과 친교를 맺고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일에 헌신하였다. 마침내 그는 더욱 열심한 신심생활을 하며 교회에 헌신하려는 열정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고향 여주에서 서울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는 서울에 살면서 그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뛰어난 화공으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여 성화(聖畵)를 그렸다. 그는 또 여러 가지 상본과 성화상을 그려 열심한 교우들과 주문모 신부께 드렸다. 그는 서양화의 기법을 익힌 천주교 신자로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가 되었다. 조선왕조 순조실록에는 이희영 루가가 서양화의 절묘한 화가임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희영은 호가 추찬이며, 온성 사람으로 순조 원년(1801년) 신유년에 사학죄인으로 지목되어 옥사했다』

그리고 글씨와 그림 재주가 다른 사람이 따르지 못할정도로 뛰어났다고 평하고 있다. 이로서 그는 성화를 그리다 순교한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아깝게도 이 최초의 우리나라 서양화가 중의 한 사람인 이희영의 그 뛰어난 그림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박해 중에 특히 그의 성화는 숨겨지고 없어졌으며,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견도(犬圖)」(숭실대학교 박물관 소장)가 있을 뿐이다.

그러던 중 뒤늦게 1984년경에 이희영 루가의 호인 「추찬(秋餐)」이란 낙관이 선명한 「쌍견도」가 발견되었다. 이로서 작가가 천주교 순교자이며, 또 서양화 기법의 한국전래를 가늠할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 한국천주교 미술사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쌍견도의 발견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자 미상인 「맹견도」 역시 이희영 루가의 작품이 아닐까하는 추정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북경을 왕래하던 교우들이 서양화 기법을 익혔고, 그 교우들의 작품임이 분명한 저 「맹견도」의 작가가 이희영 루가로 밝혀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신심 깊은 한 예술가의 한없이 아름답던 삶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저녁 노을처럼 아쉽게 사라져 갔다. 포청과 의금부의 극심한 형벌을 이겨낸 그는 그의 영원한 신앙의 동지 김백순과 함께 1801년 3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치명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고 개선하니 그 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김길수 교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