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유박해 순교자들 (28) 황일광 알렉시오

김길수 교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입력일 2001-09-23 수정일 2001-09-23 발행일 2001-09-23 제 2268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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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으스러지는 매질 속의연히 신앙 고백한 백정
평등한 사람 대접에 감사와 기쁨의 전율
철저한 신분계급사회였던 조선시대에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삶은 그것 자체가 치욕인 것처럼 비참했다. 권문세도를 누리는 사대부들이야 아예 별도로 친다 하더라도, 일반 서민들도 상종해주지 않는 천민 중의 천민 층의 하나가 소 잡고 돼지 잡는 일로 생계를 꾸려 가는 소위 백정(白丁)들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천한 것들이었다. 일반서민 신분의 어린이들조차 나이가 얼마든지 관계없이 백정을 보고는 야자로 부르며 예대하지 않고 마구 놓아 말했다. 그들은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으니 동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따로 저들끼리 모여 백정촌을 이루고 살아야 했다.

황일광(黃日光, 1756~1802)은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백정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비참했다. 온갖 멸시와 천대 속에서 동리밖에 백정촌에서 종들보다 더 낮은 천한 것들로 취급받으며, 사람도 아닌 것처럼 품위를 잃은 존재로 다루어지는 수모를 무수히 겪었다. 그것은 그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슬픈 유산이었다. 그리고 풀려날 수 없는 운명의 멍에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뛰어난 지능과 예민한 정신을 지녔으며, 매우 명랑하고 솔직한 성격을 타고나 열렬한 마음으로 살았다. 그의 지능과 통찰력은 오히려 자신의 슬픈 유산과 운명을 예리하게 감지하고 더 큰 고뇌에 차게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비뚤어지지 않고 열렬한 마음으로 솔직하고 명랑한 성격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천민도 사람임을 엄숙하게 느낄 수 있게 한다.

천주교가 이 땅에 선교되면서 인간평등사상은 실현되었고, 이 당연한 평등이 지극히 불평등한 사회에서 용납되지 못해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천주교 전래의 가장 큰 사회·문화적 영향의 하나가 바로 인간평등의 정신을 이 땅에 실제로 이루어 내며 체험하게 한 것이다.

1798년 황일광은 그 한 많은 생의 중반에 이르러 참으로 우연한 기회에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李存昌)의 인도를 받아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그는 목마른 열정으로 천주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알렉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교우들은 그가 천민 중에 천민인 백정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초대교회 평신도들의 열절한 형제애는 따뜻한 애정으로 그를 형제로 받아들이고 평등하게 대우했다.

백정인 황일광은 난생 처음으로 그것도 지존한 양반들에게 예대를 받았다. 이럴 수가 있는가! 그는 감격했다. 비로소 사람의 대접을 받은 기쁨에 전율하며 주님을 찬미했다. 그는 『나는 두 개의 하늘이 있다. 하나는 이미 이 세상에 또 하나는 후세에 이렇게 해서 두 개다』라고 기뻐하며 말했다.

황일광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경상도 벽촌으로 동생과 함께 옮겨 살며, 그의 천한 신분을 이용하여 박해 중에 있는 교우들과 쉽게 연락을 취했다.

1800년경 그는 경기도 광주에 있었다. 정약종(丁若種)의 집에 하인들과 더불어 살면서 신앙적 열성은 더욱 깊어져 모든 신앙인들을 감탄케 했다. 8개월 뒤 서울로 올라와 땔나무를 사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당했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포졸들에게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나리들은 나를 남원(南原)고을에서 살기 좋은 옥천(沃川)고을로 옮겨주니 이 큰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라고 했다. 그는 이 위기에서 천성의 명랑함을 발휘해 남원고을(나무하러 가다)에서 옥천고을(감옥으로)에 가게 되었음을 빗대어 말하여 내심으로는 순교의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황일광 알렉시오는 옥중의 무서운 심문에도 불구하고 품위를 지키며 너무도 고상하게 그리고 거룩하게 주님의 진리를 증언하여 심문하던 관리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철저한 신분계급의식에 물들어 있는 관리들에게 그의 고결한 증언은 오히려 역겹게 느껴졌다. 백정이 어떻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이 거룩한 증거자의 다리 하나가 부러져 으스러지도록 잔인하게 매질했다. 그러나 황일광은 『만 번 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님을 배반하지 않겠으니 저를 마음대로 해 주십시오』하면서 의연했다.

이 장한 순교자의 결안은 순조 원년 12월 26일에 내려졌고 그의 출생지인 홍주로 보내어 사형집행을 당하게 하였다. 부러진 다리로 들것에 실려 가면서 그 고통 중에도 그는 그의 타고난 명랑성을 보존하였다. 아내와 아들이 최후까지 그를 도우려 따라왔으나 정(情)으로 어떤 유혹을 당할까 두려워하며 그들을 가까이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의 고향 홍주에서 1802년 2월 2일 김귀동과 함께 참수 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너무도 비천한 신분의 백정이었기에 그토록 그의 덕행은 대조를 이루며 모든 교우들 사이에 유명해졌다. 교우들은 그를 가장 훌륭한 증거자들 중에 하나로 기억하며 경의와 감탄하는 마음으로 그의 생애를 전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진리가 우리나라 초대교회에서 그렇게 장하고 아름답게 증거 되는 은혜로움을 우리는 황일광 알렉시오에게서 본다.

김길수 교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