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월간 ‘레지오 마리애 편집장’ 박광호 신앙수기] 내영혼 쉴데없는 길섶에 (14) 제14장 ‘레지오 마리애’ 편집장

입력일 2001-09-16 수정일 2001-09-16 발행일 2001-09-16 제 2267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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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보상하시는 분이어서 내가 당신께 위탁하고 봉헌하는 만큼 은총을 주셨다.
윤락 여성 선도 활동은 일찍이 레지오 창설자인 프랭크 더프 씨가 큰 성과를 거두었던 활동이다. 그분의 활동에 비하면, 서울 신정동 성당 「죄인의 의탁」 쁘레시디움에서 펼친 활동은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원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해 윤락 여성 두 사람이 교화되었음은, 한 영혼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했다는 기쁨을 주었다. 이 밖에 역시 내가 단장으로 있던 「치명자의 모후」 꾸리아에서는 환경 보전 활동에 주력했다. 본당에서 직경 3백 미터에 해당하는 동네 거리를 매월 1회씩 쁘레시디움 단원들이 청소했고, 서울 수도사업소의 지원을 받아 약수터를 비롯한 여러 곳의 수질을 검사하여 교우들에게 알렸고, 공원에 수백 그루의 무궁화 묘목을 식재하기도 하였다. 이런 여러 활동은 우리 교회가 사회 참여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또한 직접 이런 활동들을 주관하면서 교회 활동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에서 사회 각 분야의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1987년 가을에 S출판사를 그만두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만큼 경제적인 어려움이 컸던 것이다. 얼마 후 서광사 김신혁 사장이 성 요셉 출판사를 소개해 주어 편집장으로 부임했다. 새로 옮긴 출판사의 한종배 사장은 나의 능력을 많이 아껴 주었다. 한편 나는 교회 서적을 출판하느라 신앙심 하나로 버티는 사장이 존경스러웠고, 또 직원들의 봉급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정한 날에 마련하는 정성이 고마웠다. 그제야 내가 가장으로서 가족들 앞에 고개를 들게 되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봉급이 고스란히 담긴 봉투를 아내에게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듬해 봄에 이 출판사를 통해 장편소설 「사랑의 끝」을 출간하고, 이어서 「애리(愛利)」를 세상에 내놓았다. 「사랑의 끝」은 내가 아내를 만나 완쾌해 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쓴 상곀 2권의 소설이었고, 「애리」는 실재 인물을 모델로 하여 쓴 한국판 「테스」였다. 이 두 작품으로 비로소 작가 정신과 문학성이 있는 소설을 쓰게 되었다. 이 때까지 「흑조시인회」동인지를 통해 꾸준히 시를 발표한 나는 시와 소설 두 장르를 앞으로 계속해서 함께 하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이렇게 문학에 정진하면서 레지오 활동에 열을 올리던 나는 레지오 마리애 양천지구 꼬미씨움 부단장에 선출되었다. 이로써 더 많은 시간을 주님 사업에 바치게 되었고 더욱 성화의 삶을 살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보상하시는 분이어서(이것은 나의 오랜 체험에서 실증되었다) 내가 당신께 위탁하고 봉헌하는 만큼 은총을 주셨다. 1991년 2월에 「레지오 마리애」월간지 편집장이 된 것도 이와 같은 은총이었다. 그렇다. 이것은 결코 우연히 주어진 자리가 아니었다. 레지오 월간지 편집장은 일반 잡지 편집장과 달리 특별히 레지오 마리애를 잘 알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문학적인 능력과 오랜 레지오 단원 생활을 해 온 나를 편집장에 앉힌 것이다. 실로 당신의 사업에 가장 합당한 사람을 불러 주셨다고 나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한 만큼 남다른 사명감과 애착을 가지고 레지오 월간지를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나는 대부분 독자들에게서 「월보」라 불리던 월간지를 「월간지다운 월간지」로 만들기 위해 두 차례에 걸친 독자 설문을 토대로 많은 변화를 가졌다. 무엇보다도 신앙 체험과 레지오 활동 체험 등의 고정란을 신설하여 소개함으로써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성화(聖化)의 길잡이가 되도록 하였다.

나는 레지오 월간지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얻은 것이 많았다. 그 첫 번째는 사람이다. 오늘에 이르도록 월간지에 글을 게재하는 분들 중에서 친교를 갖게 된 분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1994년 8월 5일 피서지에서 익사 직전의 3명을 구하고 유명을 달리한 배문한(도미니코) 신부님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수원 가톨릭 대학 학장이던 배문한 신부님은 시골 할아버지 같은 소탈함과 구수한 필력, 그리고 다정한 인품과 나를 아껴 주는 마음이 유난스러웠다. 배 신부님은 주일이면 곧잘 나하고 아내를 수원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당신이 직접 운전하여 삽교천으로, 대부도로, 제부도로, 혹은 해미 성지로, 혹은 정조 임금이 모셔진 능으로 안내했다. 문학을 하려면 많은 곳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이분과 같은 성직자를 다시 보지 못했다. 사랑의 원자탄 공장장이기를 원하셨던 배문한 신부님은 정말 성인 같은 성직자였다. 이분의 별세는 한국 교회의 손실이자 나의 손실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