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유박해 순교자들 (27) 송마리아와 신마리아

김길수 교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입력일 2001-09-16 수정일 2001-09-16 발행일 2001-09-16 제 2267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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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심 깊었던 왕가 부인들
주문모 신부 피신처도 제공
재판이나 심문 없이 대왕대비 사약 내려
한국초대교회에서 가톨릭의 보편성은 신분의 계층과 남녀노소, 파당과 지역을 넘어서 순교자가 나와 더욱 놀랍게 증거 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왕조에서 천주교를 박해하고 있었지만 바로 그 왕가의 왕족이 신앙을 지키고 순교함으로써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초월한 하느님 진리의 보편성을 웅변하고 있는 예가 됨을 볼 수 있다.

정조 임금에게는 이복형제로 은언군이 있었다. 그런데 정조 10년에 그의 큰아들인 상계군이 반역죄로 몰려 죽게되자 은언군은 셋째 아들 전계군과 함께 강화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리고 은언군의 부인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서울의 구궁인 양제궁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살게 되었다. 양제궁은 원래 은언군의 모친인 양제부인 부안 박씨가 거처하던 옛궁의 이름으로 전동인데, 상계군이 모반죄로 몰려 죽고 은언군과 전계군이 강화도로 귀양가고 남은 부인들인 송씨와 신씨가 유폐되어 사는 역적의 궁이라 하여 폐궁이라 불렸다.

이때 강완숙은 송씨와 신씨의 처지를 동정하여 이들과 접촉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이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 잘못되면 모반죄에 연좌된 왕족들과의 접촉으로 어떤 화를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기에 누구도 그들과의 접촉을 꺼려했다. 그런데도 강완숙은 두려워하지 않고 대담하게 왕족인 폐궁의 송씨와 신씨를 만나려 은밀히 드나들고 폐궁의 나인들과도 접촉했다. 외롭고 쓸쓸한 처지에서 두 왕족의 부인은 천주교 교리를 전해 듣고 크게 위로 받으며 깊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강완숙은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그 집에 모시고 가서 그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들은 마리아를 세례명으로 하여 입교하게 되었으니 이들이 송마리아와 신마리아이다.

이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교리서를 읽었으며, 자주 주문모 신부를 모셔다가 강론을 경청하면서 천주교 신자로서 지킬 모든 본분을 성실하게 지켰다. 강완숙과 송마리아, 신마리아의 교류는 매우 친밀하였으며 대군의 부인들인 그들은 자신의 궁녀들에게도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다. 이들은 주문모 신부가 만든 최초의 평신도사도직 단체인 명도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신심생활과 사회활동에도 은밀하게 참여하였다. 그래서 신유박해가 일어나 매우 긴박한 상태에서 이들은 주문모 신부의 최후의 피신처로 폐궁의 은밀한 곳을 제공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송마리아와 신마리아는 왕족 부인으로서 강완숙과 함께 당시 한국교회 안에서 신자로서 활동하며 미사에 참례했고, 특히 여신도들의 활동에도 가담하였다.

이들의 은밀한 활동은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양제궁의 궁녀이던 서경의의 밀고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밀고에 의해 폭로된 요지는 송마리아와 신마리아는 천주교 교리 배우기를 좋아해서 강완숙이 경문을 대단히 잘 해석해 주었으며, 이 때문에 폐궁과 강완숙의 집을 자주 왕래하면서 교리를 배웠는데, 서경의도 함께 자주 왕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경의 자신이 목격한 주문모 신부의 폐궁으로의 피신 광경이었다.

대왕대비는 왕족의 부인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켜 주었다는 사실에 크게 노하여 즉시 사사를 인준하였다. 두 왕족 부인의 사사는 어떤 재판도 심문도 어떤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다만 1801년 3월 16일 대왕대비의 인준만으로 이뤄진 것이다. 대비가 인준한 명문은 이러했다.

『강화읍에 갇힌 죄인 인(은언군)의 처 송씨와 상기 죄인 인의 아들 담의 처 신씨의 사건에 대하여,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둘 다 사학에 물들었음이 명백하고, 이들이 고약한 외국종자와 상통하고 외국인 신부를 보았으며, 또 엄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염치없이 그를 자기들 집에 숨겨 두었음이 명백하다. 이런 중대한 죄를 생각하면 그들은 하루라도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음이 만인에게 명백하다. 그런 즉 그들에게 독약을 내려 둘이 함께 죽게 하라』

이 명령은 다음 날 3월 17일(음) 바로 시행되어 두 왕족 부인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두 부인은 신자로서 자살 죄를 피하기 위해 독약을 스스로 마시기를 거부하여 집행관이 억지로 먹여야만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송마리아와 그의 며느리 신마리아는 왕족의 부인이면서 그들의 신앙과 박해받던 주신부에게 용감하게 은신처를 제공한 죄목으로 사사되어 선종했다. 이들의 최후에 대한 더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폐궁은 엄중히 닫혀있고 일체의 외부와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왕족 부인의 사사는 그들이 신앙생활에 충실했고 그들의 열성과 그들이 가진 왕족부인으로서의 명성과 지위 때문에 박해받던 당시 조선교회에 크나 큰 격려가 되었다고 달레신부는 그의 교회사에서 전하고 있다.

강화도에 귀양간 은언군(그의 손자가 조선왕조 제25대 철종이 된다)은 그의 부인 송마리아의 신앙생활을 알기는 했겠지만 자신은 신자가 아니었는데도 이 사건으로 인해 이복형제인 정조가 지켜주던 그 생명을 결국 정순왕후 김대비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김길수 교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