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유박해 순교자들 (26) 한신애 김연이 강경복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 교수)
입력일 2001-09-09 수정일 2001-09-09 발행일 2001-09-09 제 2266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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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평민 궁녀…신분은 달라도
모든형벌 기쁘게 참고받아 순교
주신부 도와 사무처리
성서강의 연락책 등도
조선시대에는 여자로서 형벌을 받을 경우, 대게 본 이름은 없이하고 기록에도 성을 밝히지 않은 체 순전히 재판을 위하여 그들에게 지어준 이름만으로 지칭했기 때문에 여자순교자들의 이름을 대체로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완숙과 그녀의 동료 순교자들의 성과 이름은 「실록」과 「징의」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형장으로 가는 길에 거룩한 기쁨이 빛나는 얼굴로 기도하여 군중을 감탄하게 한 여인들이 강완숙, 문영인, 한신애, 김연이, 강경복 등이다.

한신애(?~1801년) 아가다는 양반 출신의 과부로 강완숙과 함께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그는 양반가문에서 예절을 익히고 출가했으나 남편 조시종과 사별하고 영세 입교한 뒤로는 오직 천주교 교리공부에 열심 했고 또 복음전파를 위해 여생을 바쳤다. 그녀가 강완숙과 함께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양반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었고, 과부의 몸으로 자녀는 조혜의라는 딸 하나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로 처지가 비슷하였기에 강완숙과는 더욱 친숙한 사이였다. 한신애는 강완숙의 집에 수 십일씩 머물며 함께 선교활동과 교회사무를 처리하며 주문모 신부를 도왔다.

한신애는 중인이던 이합규와 양반인 정광수와 함께 성서를 강독했으며, 자기 집 노복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교리를 가르쳤다. 그리고 천주교의 평등사상에 따라 남녀유별이나 신분의 귀천에 구애됨이 없이 폭넓게 사람을 상대하고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강완숙의 집과 자기 집을 왕래하며 심부름했던 김연이와 참판 이중복의 부인인 신소사에게도 전교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하기도 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신애는 자신이 양반이며 과부인 신분을 이용하여 자신의 집에 정복혜가 각처에서 거두어 온 천주교 서적과 성물들을 도맡아 감추어 두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이렇게 강완숙과 함께 폭넓게 영향력을 미치며 활동하던 그녀는 1801년 2월에 체포되어 기쁨에 넘친 얼굴로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순교의 피를 흘렸다.

김연이(?~1801년) 유리안나는 서울 계동에 살았다. 그녀는 조예산의 부인인 한소사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되었고, 주문모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김연이는 정복혜와 함께 평민의 신분인 여인으로서 남녀지도급 교우들의 연락관계를 담당했다. 그녀가 주로 연락을 했던 집은 홍필주의 집을 비롯하여 참판 이가환의 집, 조예산의 집 등이었으며, 주문모 신부의 지도 아래 모든 신자들과 함께 미사에 참례하며 성실한 기도생활을 했다. 그리고 궁내에 사람을 보내 폐궁나인인 강경복과 서경의 등을 안내하여 주신부의 강론을 듣게 하고 강완숙의 집에서 교리강학을 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김연이는 강완숙의 부탁을 받고 황사영을 숨겨주기도 했다. 황사영은 임대인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때 강완숙은 계동에 있던 그녀의 집에 피신하게 했다가 이용겸과 김백심의 집으로 옮겨 피신하게 했다. 이 무렵 강완숙은 황사영을 김연이의 집에서 3일간 숨어 지내게 했는데, 김연이는 이들 신자들의 피신을 정성껏 도왔다. 황사영이 제천 김귀동의 집으로 피신하기까지 당시 여교우들은 부녀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기 이전까지 남교우들의 피신처를 제공하며 적극적으로 은신을 도왔다. 김연이는 이 무렵 교회 내 평민 여교우로 중요한 역할을 다 해내다가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순교의 장한 길로 나아갔다.

강경복(?~ 1801년) 수산나는 정조 임금의 이복 형제인 은언군의 부인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유폐되어 있었던 폐궁(양제궁)의 나인이었다. 그녀가 천주교를 알고 서적을 얻어 보게된 것은 홍문갑의 어머니에게서 였는데, 그녀는 천주교 교리를 알고 하느님의 진리에 심취하여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변함 없이 신앙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이렇게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기 시작한 때가 1797년 8월경 폐궁에서 였다. 그녀는 폐궁의 나인으로 있으면서 홍문갑의 집을 통해 강완숙을 알게 되었고 강완숙은 또 그녀를 주문모 신부에게 인도하였다. 이렇게 하여 폐궁의 왕가 송씨와 신씨가 강완숙과 주문모 신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강경복은 폐궁과 강완숙의 집을 왕래하면서 연락을 주선하였다. 그녀는 강완숙의 집에 친숙하게 왕래하면서 친지라고 자칭하였고 주신부로부터 수산나라는 세례명으로 성세입교 하였다. 그리고 강경복은 폐궁에 유폐되어 있던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그의 며느리 신씨를 강완숙의 집으로 인도하여 첨례에 참례하게 하고 주신부의 강론을 듣게 하였으며, 마침내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박해가 일어났을 때 폐궁의 송마리아와 신마리아는 주문모 신부를 마지막으로 폐궁에 은신하도록 해드린 것이다.

강경복은 신유년 정월에 부친 대상을 맞아 제사에는 참석하지 않고 홍문갑의 집에 머물다 체포당하여, 문초록에 기록된 것과 같이 『마음이 견고하여 변함이 없어 모든 형벌을 기쁘게 참아 받고』 순교의 형장으로 갔다.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