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내가 만난 김수환추기경] 김현 (한국가톨릭언론인협의회 고문)

정리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09-04-07 수정일 2009-04-07 발행일 2009-04-12 제 2643호 1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이 사회에 기쁜 소식 전한 커뮤니케이터”
언론 소명에 대해 깊은 이해 갖고 항상 따뜻이 감싸 줘
미사 생중계 중 독재 정권에 일침 놓기도 했던 양심가
1970년대 중반 당시 가톨릭언론인회 회장단과 함께 한 김수환 추기경 모습. 왼쪽부터 김현씨, 김몽은 지도신부, 김수환 추기경, 정광모씨, 봉두완씨.
김현 고문
1960년대 접어들어 보편교회는 매스미디어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과 지원에 새 힘을 불어넣었다.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 기간 중인 1963년, ‘매스미디어에 관한 교령’을 발표하면서 매스미디어는 인류 발전과 복음화를 위한 중요한 도구로서 자리매김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1964~66년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 사장을, 1968년부터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재를 역임하며 언론의 역할과 소명에 대해 누구보다 큰 열정과 지지를 보냈다. 그러한 모습은 서울대교구장 취임과 추기경 임명 후 가톨릭언론인 활동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졌다.

1963년부터 1994년까지 TBC와 KBS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한국가톨릭저널리스트클럽(현 한국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한 김현(요셉) 한국가톨릭언론인협의회 고문은 “김 추기경님은 언론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분주한 일정 안에서도 가톨릭언론인들이 참석을 요청하는 모임과 행사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한다.

김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으로 부임한 직후, 김 고문은 일반 언론으로서는 최초로 서울대교구장을 인터뷰한 언론인이었다.

# 추기경님과의 첫 인터뷰

김수환 추기경님이 서울대교구장으로 부임한 후 두어 달이 지난 후였다. 당시 동양방송(TBC) 라디오PD였던 나는 특별인터뷰를 기획, 직접 김 추기경님 인터뷰에 나섰다. 그 인터뷰는 김 추기경님이 교구장으로서 처음 목소리를 낸 일반 언론 데뷔의 자리였다.

그 즈음, 한국 교회는 사실 대사회적인 홍보와는 담을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습이었다.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기선 신부님께서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는 정도였다. 당시 교구장 비서로 활동하시던 장익 주교님의 배려로 나는 재빨리 일정을 잡고 녹음을 위해 명동 주교관을 찾았다.

김 추기경님의 첫인상은? 솔직히 촌스럽다는 느낌이었다. 얼굴도 잘생긴 편은 아니었고, 대주교 복장이 아닌 일반 사제들과 전혀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한두 마디 대화가 이어지면서 ‘보통 분이 아니신걸’하는 느낌을 받았다. 성직자에게는 결례가 될 수도 있는 짓궂은 질문에도 매우 진솔하게 대답하시는 모습이 더욱 인상 깊게 남았다. 김 추기경은 언론의 올바른 역할과 소명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갖고 계셨다. 그러한 면모는 오래 지나지 않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 전국에 생중계됐던 ‘양심의 소리’

1971년 성탄 전야, 잘 알려진 대로 김 추기경님은 그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을 터뜨리셨다.

예수성탄대축일 전야에는 으레 자정미사를 전국에 생중계하곤 했다. 여러 생중계 프로그램 가운데 미사 중계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때문에 미사가 시작되자 촬영과 편집을 실시간 수행하는 PD 외의 스텝들은 다소 긴장을 풀고 있는 상태였다. 그 분위기는 강론이 시작된 때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KBS 방송국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당시는 유신체제가 시작되진 않았지만, 군사정권 아래 언론에 대한 경계와 탄압이 공공연하던 때였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고질적 부패와 사회 불안의 연원이 현재의 부조리한 권력과 금력의 정치 체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진실로 과감한 혁신이 없으면 부정부패 일소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습니다….”

김 추기경님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들고 강론을 이어가자 방송 관계자들은 일제히 당황하기 시작했다.

“정부나 교회나 사회 지도층은 국민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양심의 외침을 질식시켜서는 안 됩니다. 만일 현재의 사회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독재 아니면 폭력 혁명이란 양자택일의 기막힌 운명에 직면할지도 모릅니다….”

생방송 중계팀을 향해 방송국 각 부서 책임자들의 전화에 이어 문공부에서 전화가 빗발쳤다.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국가 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기어이 이 미사는 전국 생중계 도중 중단됐다.

강론 내용과 아무 관계가 없었던 PD와 아나운서, 방송관계자들도 줄줄이 조사를 받고 고초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지 다음날인 성탄대축일 아침에 발생한 대연각호텔 대화재로 인해 강론 사태의 여파가 다소 묻히긴 했다. 이후 성탄전야미사 중계는 오기선 신부님이 모아들인 기부금을 통해 민간방송인 TBC에서 이어갔다.

20여 년 후, 그때 미사중계 사태로 인해 한국 사회에 더욱 회의를 느끼고 이민을 떠났던 한 아나운서가 방한했기에 함께 김 추기경님을 예방한 적이 있다. 추기경님은 주교관을 찾은 그분의 두 손을 꼭 잡으시더니 그저 “미안합니다”라고 한마디를 건네셨는데, 그 한마디가 그렇게 따스할 수 없었다.

# 언론인들의 진솔한 후원자

서울대교구장 재임기간 뿐 아니라 은퇴 이후에도 사회 각계 인사 뿐 아니라 수많은 기자들이 김 추기경님의 집무실을 오갔지만, 그들이 말하는 김 추기경님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김 추기경님은 단 한 번도 언론이나 언론인들을 소위 ‘이용하신’ 적이 없었다. 늘 있는 그대로, 조금은 미욱하게 비쳐질 수도 있는 모습으로, 마음씨 좋은 이웃 아저씨처럼 진솔하게 언론인들을 대하셨다.

군사?유신정권 시절, 정부 관계자들이 가장 싫어하면서도 어려워했던 사람 중 한명이 김 추기경님이셨다. 교회와 정부가 사이가 나쁜 현실에서 가톨릭언론인들의 활동도 안팎으로 압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가톨릭저널리스트클럽 활동 등을 그만두라는 압박과, 휴가 중 국제가톨릭방송인협회(UNDA)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연말 보너스를 대폭 삭감당하는 부당한 처분도 받았었다. 하지만 김 추기경님은 교회 안팎에서 언론인들의 소명을 지지하시며 올곧은 뜻을 밝혀오셨다.

또 한번은 YBC(여의도 중견방송인 모임) 주최 세미나에서도 언론인들을 놀라게 하신 적이 있었다. 우리 모임에서는 추기경님을 주제발표자 중 한명으로 초청, 세미나에 앞서 모임에서는 기초 발표 자료와 토론자료 등을 만들어 보내드렸다. 그런데 김 추기경님은 뜻밖에도 직접 ‘방송의 도덕성’을 주제로 발표원고를 써오셔서 그 내용을 발표하시는게 아닌가. 김 추기경님을 더욱 신뢰하게 된 작은 일화였다. 특히 김 추기경님은 가톨릭언론인들이 주관하는 각종 세미나와 피정 등은 물론 갑작스럽게 참석을 청하는 행사에도 다른 일정을 조정해가면서 흔쾌히 참석해 언론인들을 격려해 주셨다.

# “왜 허리를 구부리셨습니까”

김 추기경님과의 만남을 돌이켜보면 김 추기경님과 주교들을 위한 매스컴 세미나에 참여하시던 모습도 생생하다.

1973년 1월 23~26일 서강대 산업문제연구소에서는 ‘주교들을 위한 매스컴 세미나’가 열렸다. 가톨릭저널리스트클럽은 주교회의가 주최한 이 세미나를 주관, 각종 강의와 토론 등을 지원했다. 세미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거나 일반 언론과 인터뷰할 때의 요령 등을 습득할 수 있는 강의와 함께, 실제 아나운서를 초빙해 인터뷰 실습까지 마련되는 자리였다. 나는 기획추진위원이자 강사로서 일정 내내 함께 숙박을 하며 동참했는데, 추기경님은 일정 내내 그 누구보다 성실히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김 추기경님은 서울대교구장으로서 본인의 뜻과 관계없이 교회 대표자로 언론에 나서야할 일이 누구보다 많았었다. 나는 추기경님께서 언론에 대응하는 모습을 볼 때면 당시의 세미나 참여가 큰 도움이 됐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그 세미나 후 나는 좀 용감한 질문을 추기경님께 하게 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하는 사진이 신문에 실렸는데 얼핏 추기경님이 박 대통령에게 굽실거리는 모양새로 보였다. 가톨릭신자로서도 방송인으로서도 난 그 모습이 내심 불만이었다. 김 추기경님 앞에서 대뜸 “왜 그렇게 허리를 구부리셨습니까?”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추기경님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그렇게 보일 수 있겠다 하시며 친절히 설명을 덧붙여주셨다. 당시 대통령과 만나는 의전 장소에는 선이 그어져, 악수를 위해서도 그 선 이상 앞으로 나아가선 안됐다고 한다. 때문에 대통령이 이동하면서 거리가 좀 멀어지기라도 하면 맞은편 사람은 허리가 자연스럽게 더 구부려지고, 카메라는 사람들 머리 위에 자리해 더욱 구부린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난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국 교회의 긍정적인 모습을 대사회적으로 더 알리려면 추기경님의 복장도 너무 소박한 것이 아니라 예복으로 좀 갖췄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여버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젊은 언론인으로서 혈기가 넘쳤던 것 같다.

김 추기경님의 선종 이후 장례미사까지 지상파 방송 3사를 비롯해 수많은 매스미디어가 김 추기경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된 모습을 보였다.

나는 장례기간 내내 각종 방송을 모니터하면서 ‘김 추기경님은 진정 우리 사회에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알려준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였구나’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김 추기경님은 진정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신 모범을 충실히 따른 분이었다.

정리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