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획-이 땅에 빛을] (8) 선택받은 과부들

이나영 기자
입력일 2009-04-01 수정일 2009-04-01 발행일 2009-04-05 제 2642호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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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칩니다”
옥에서 4년을 보내면서 모진 고문을 받은 이소사 성녀(탁희성 작).
남편과 자녀를 모두 잃고 친정으로 돌아와 망건을 만드는 일을 하며 간신히 노모와 생계를 이어갔던 김업이 성녀(탁희성 작).
포졸들에게 묵주를 증거로 보이며 자수하는 이매임 성인(탁희성 작).
성경에 등장하는 ‘과부’ 이야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루카 21,1-4)’이야기다. 부자들이 헌금함에 큰돈을 넣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시던 주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넣자 제자들을 불러 이르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103위 성인 중에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친 ‘가난한 과부’들이 10명이 넘는다. 여성의 경제·사회 활동이 거의 불가능했던 조선시대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 힘으로 살아가야 했던 이들의 생활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그 생활 속에서 믿음을 지켜내고 박해의 위협과 주변의 천대까지 이겨낸 강인한 이들. 생활비를 모두 봉헌했던 성경 속 과부의 모습이 우리 신앙 선조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봉헌하고도 생명까지 주님을 위해 바친 그녀들, 과부들의 이야기를 찾아봤다.

▨ 일가족을 주님의 품으로 이끌다 - 이매임과 조카 이정희

▲ 과부들 중 일가족을 주님의 품으로 이끈 이매임이 단연 눈에 띈다. 그는 천주교를 모르던 시절 결혼하여 스무 살에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왔는데, 그의 생활을 딱하게 여기던 같은 마을의 여 교우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 그 후 집안 식구들에게 열심히 천주교를 알렸다. 그의 전교로 오빠를 제외하고 시누이 허계임과 계임의 딸 정희·영희 등이 천주를 알게 되었고, 박해 시절 함께 자수해 위주치명함으로써 일가에서 5인의 성녀가 배출되는 위업을 세웠다. 천주를 증거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자수했다고 당당히 밝힌 이매임은 1839년 7월 서소문 밖에서 52세의 나이로 참수치명했다.

이매임으로부터 천주를 알게 된 허계임은 천주를 버리라며 목에 칼을 대는, 철저히 신앙을 거부하는 남편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생활하다 자수해 서소문 밖에서 치명했고, 이매임의 조카이자 허계임의 딸인 이영희는 동정 순교자로 이름을 남겼다.

▲ 이매임의 조카인 이정희 역시 과부였는데, 그의 삶은 강인한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정희가 시집갈 나이가 되자 천주교 신앙을 격렬히 반대했던 그의 아버지는 강제로 외교인 청년과 약혼을 시켜버린다. 이에 이정희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외교인과 결혼을 할 수 없다고 결심하고 다리를 못 쓰게 되어 일어날 수 없는 체 했다. 늘 앉거나 누워서 지내기를 3년, 아버지가 정해주었던 약혼자가 다른 이와 결혼을 하였고 이러한 사연을 모두 알고 있던 신자가 그녀에게 청혼해, 지켜오던 신념대로 교우와 결혼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결혼 2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이정희는 동생 이영희의 집으로 가서 함께 지내다가 고모 이매임, 어머니 허계임과 자수, 1839년 9월 서소문 밖에서 치명한다.

▨ 딸과 함께 주님 품으로 - 한영이·이 카타리나

▲ 한영이는 가난한 시골 양반의 외교인 가정에서 자라나 천주를 모르고 지내다가 진사 권영좌의 후처로 들어갔다. 권 진사는 명필로 당대에 이름을 떨친 사람이었는데, 중년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아내 한영이에게도 입교할 것을 꾸준히 권고했었다. 임종 시에도 이를 유언으로 남겼기에 한영이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입교를 결심한다. 남편의 임종 후 신앙을 배우기 위해 어린 딸 권진이를 데리고 한 교우 집에서 지내기로 하였는데, 이 교우집이 무척이나 가난해 모녀는 극심한 빈곤 속에서 생활하게 된다. 딸이 열세 살 되던 해 시골의 한 교우와 혼인시켰으나 사위집이 딸을 데리고 살 형편조차 되지 않았다 한다. 한영이는 부득이 사위의 친척인 정하상의 집에 딸과 함께 머물렀고 이곳에 유방제 신부가 입국 후 머물렀기에 모녀는 신부를 극진히 모셨다. 그러다 배교자의 고발로 1839년 함께 체포된다. 체포 후 딸 권진이의 아름다움을 동경한 포졸이 그녀를 풀어주었고, 도망가다 다시 체포되어온 딸로 인해 한영이는 더욱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된다. 여러 상황에서도 남편이 권한 천주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한영이는 사형을 선고받고, 1839년 12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된다. 도망갔다 다시 체포된 그녀의 딸 권진이 또한 어머니의 뒤를 이어 1840년 치명했다.

▲ 이 카타리나는 동정을 지키다 순교한 조 막달레나의 어머니다. 이 카타리나는 교우 부모 밑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교리에 밝지 못했던 부모 탓에 외교인과 결혼하게 된다. 부모의 뜻에 따라 외교인과 결혼을 했지만, 그 후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꾸준히 남편을 권면하여 남편의 임종시에는 대세를 주어 선종하게 했다. 자녀들에게도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 함께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맏딸 조 막달레나가 동정을 지키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에는 딸을 시집보내려 애썼는데, 이는 외교인들이 의심할 것과 자신이 죽을 경우 딸이 가족도 없이 혼자 지낼 것을 염려해서였다. 결국 딸 조 막달레나는 혼사를 피해 가출, 30세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고 그 후 1839년 모녀는 함께 체포된다. 모진 고문을 받은 몸으로 좁은 감옥에 갇혀 한여름을 보내면서 모녀는 열병에 걸렸고, 옥중에서 함께 선종했다.

▨ 한 부모 밑에서, 한 믿음을 위해 - 이소사·현경련

▲ 이소사는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웠으나, 교인인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종교적 무관심으로 17세에 외교인에게 출가했다. 하지만 아이를 하나도 낳지 못한 채 3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 동생 이호영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아버지가 남긴 얼마 되지 않는 가산으로 연명하다가 이마저도 곤란해지자, 삯바느질로 늙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부양했다. 몹시 가난하고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늘 밝은 표정으로 지내며 믿음을 지켜나갔다.

1835년 집으로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동생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모진 고문 속에서 동생이 의식을 잃고 쓰러질 때마다 곁에서 격려하여 믿음을 버리지 않도록 권고했다. 수많은 혹형 을 받으면서 옥에서 4년을 보낸 후, 1839년 5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 56세의 나이로 치명했다.

▲ 현경련은 순교자소전 「기해일기」를 남긴 현석문의 누이다. 독실한 신앙을 가졌던 아버지 현계흠의 영향으로 아주 어려서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18세 되던 해 최창현의 아들과 결혼하였으나, 신유박해로 아버지와 시아버지를 동시에 잃고 결혼한 지 3년 후에 자식도 없이 남편과도 사별했다.

총명하고 교리 공부에 열심이었기에 사별 후 친정으로 돌아와서는 교우들을 가르치고 냉담자를 찾아 권면하며 지냈다. 유방제 신부가 입국한 후에는 신부의 생활을 돕고 여 교우들을 보살피며 여 회장직도 맡았다. 1839년 체포되었는데, 서양인 신부의 충복으로 알려진 동생 현석문을 잡으려 혈안이 된 포졸들은 그의 누이인 현경련에게 보다 가혹한 형벌을 가하며 동생의 거처를 물었다. 서양인 선교사와 동생 현석문의 거처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에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고문을 받아야만 했다. 동생에게 격려의 말을 전하는 편지를 남기고는 1839년 12월 서소문 밖에서 치명했다.

이밖에도 ▲ 외교인에게 출가했다가 뒤늦게 회심한 후, 남편과 삼 남매를 모두 잃었음에도 믿음을 지키며 살았던 한아기 ▲ 앞을 보지 못하는 남편을 여읜 후 남아있는 남편의 재산을 모두 버리고 천주를 위해 자진해서 가난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자수한 김성임 ▲ 남편이 죽은 후 비로소 천주교를 익혀 자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까지 입교시켰던 김노사 ▲ 김업이, 김장금, 박봉손, 홍금주 등도 과부였으며 이들은 모두 1839년 서소문 밖에서 치명했다.

▲ 외교인에게 시집가 꾸준히 권면했지만 결국 입교하지 않는 남편 곁에서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 많은 고초를 겪었던 김 바르바라는 주림과 목마름, 열병으로 옥에서 선종했고, ▲ 과부 이간난, 우술임도 옥에서 치명했다.

이나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