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김수환 추기경 영성을 말한다] 황종렬 박사가 말하는 '민족의 사제' 김수환 추기경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09-03-10 수정일 2009-03-10 발행일 2009-03-15 제 2639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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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가장 아래에서 '사랑의 사회' 건설하자
‘구조화된 인격화’‘인격화된 구조화’ 모두 겸비
스스로 성찰·노력하는 김 추기경 모습 본받길
하느님 안에서 한국 문화 포용… 토착화 이뤄야
황종렬 박사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교회 안팎에서는 그의 영성과 업적을 올바로 연구하고, 이를 확산하려는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영성은 흔히 ‘사랑의 영성’ ‘겸손의 영성’으로 불린다.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곁에 머물고자 했던 김 추기경의 영성은 그의 하느님 체험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더욱 더 낮은 곳으로 향하고자 했던 김 추기경의 간절한 소망으로 드러났다. 그의 온 삶을 관통하는 영성(정신)은 무엇인가. 그의 영성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어 어떤 모습으로 현현되었는가. 각계 전문가들의 증언과 분석을 통해 김수환 추기경의 영성을 추적해본다.

“김수환 추기경님이야말로 ‘민족의 사제’라고 불릴 만한 분입니다. 그분의 영성을 올바로 알고 우리 삶에서도 본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분이 어떠한 마음으로 사제가, 주교가, 추기경이 되었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 역사 안에서 ‘민족의 사제’라는 수식어를 스스럼없이 받은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다. 김대건 신부나 최양업 신부 등도 민족을 품에 안은 모습이라기보다 순교자로서의 면모가 더욱 각인돼 이어져온다.

평신도 신학자이자 생태영성연구원 공동대표인 황종렬(레오)씨는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영성을 되짚어보며 그를 ‘민족의 사제’라고 일컫는다. 황대표는 “한국 역사 안에서 윤형중 신부님이나 지학순 주교님 등도 매우 훌륭하게 사신 분들이시지만 김 추기경님은 개개인의 훌륭한 면면을 넘어 ‘민족의 혼을 하느님께로 이어준 사제’로 살아왔다”고 전한다.

황종렬 대표는 우선 김 추기경의 사목표어를 화두로 연구 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김 추기경이 사제품을 받을 때 선택한 사목표어는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였다. 이후 주교와 추기경으로 임명될 때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를 사목표어로 내세웠다. 황대표는 “김 추기경은 특히 주교 직분을 맡으면서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해야할 사제로서의 소명을 더욱 깊이 되새겼다”고 설명한다.

황대표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표현은 김 추기경의 정직함을 드러내는 또 다른 고백”이라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중요한 키워드로 내세운다.

“흔히 김 추기경님을 겸손한 분이라고 말하는데, 이 겸손함은 일반적인 의미를 넘어서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끊임없이 성찰하는 모습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용서를 청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겠다’는 고백의 표현이다. 따라서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고 받은 이들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헌신하며 살아간다.

김 추기경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겠다는 뜻을 세워 사제가 됐다. 하지만 이 뜻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김 추기경은 이러한 겸손함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더욱 낮은 곳으로, 더욱 많은 이들에게로 가져갔다. ‘민족의 사제’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한 것이다.

김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 착좌식에서 밝힌 답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해달라는 우리 사회의 요구를 명심합시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민족공동체의 복음화를 염두에 두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헌신할 뜻을 비친 모습의 한 예다.

“김 추기경님은 생전에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인간다운 삶이 유린되는 사회와 개인을 구원하여 사랑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사회 건설은 민족 없이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사랑의 사회 건설’을 위해 김 추기경이 강조한 것은 사회복음화에 앞선 자신의 복음화였다. 황 대표는 김 추기경의 영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언어로 ‘인격화된 구조화’, ‘구조화된 인격화’를 제시한다.

“김 추기경님은 평소 ‘우선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자신부터 복음화 되어야 그것을 통해 사회복음화를 이뤄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황 대표는 가톨릭 신자들의 경우, 개개인의 인격을 다듬는 데는 열심이지만, 사회제도의 불합리 등을 이야기하는 ‘구조화’에 투신하는 면이 약한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한다. 또 사회운동가 등은 ‘구조화’를 강조하지만 개개인의 ‘인격화’에는 충분한 역량을 쏟지 못한 면이 있다고 말한다. 반면 김 추기경은 자신의 인격을 올바로 세우고 사회 정의를 구현하며, 사회 정의를 세우면서 자신의 인격을 다듬어 가는 데도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점을 중요한 모범으로 지적한다.

“김 추기경님은 시대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았던 인물입니다. 그분은 사회학을 공부했고, 유학시절부터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가톨릭신문에서 재직하면서 공의회 결과를 한국 교회에서 알리고 실천(육화)할 수 있도록 애썼습니다. 주교품을 받은 이후에도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로서 시국담화문을 내는 등 능동적으로 사회복음화에 나섰고, 서울대교구장으로서 한국 교회를 세상 속의 교회로 세우는 대변자로 활동해 왔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우연히 이뤄진 것이 아니라 김 추기경님이 복음적 응답을 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고, 스스로 그 응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로 맺은 열매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설명은 김 추기경이 생전에 강조한 ‘미사의 반구조적인 성격’과도 일맥상통한다.

“김 추기경님이 1988년 사제총회 때 하신 강론을 예로 들어 봅니다. 그 강론에서 김 추기경님은 ‘미사성제는 반구조적(Anti Structual)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신분과 계급의 구별, 남녀의 구별, 유다인이나 아니냐는 민족의 구별이 엄격한 ‘구조적’인 제사였습니다. 하지만 신약의 제사 즉 주님의 식탁인 미사성제에서는 계급도 없고 남녀, 빈부, 민족의 차가 없습니다. 이러한 설명과 함께 김 추기경님은 미사의 반구조적인 성격을 구현하는 실천의 하나로 가난하고 약한 이들이 공동체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자연히 사제가 먼저 그들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덧붙여 황 대표는 “김 추기경님은 차별을 제도화하고 구조화하는, 게다가 정당화하기까지 하는 사회적 모순을 개선하는데 가장 능동적이었다”며 “구체적으로는 지배에 맞서서 사랑과 돌봄을, 차별에 맞서서 포용과 화해, 일치를 추구했다”고 설명한다. 기득권과 지배자 중심의 사회적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영적 투신의 방안으로 ‘반구조적 성격의 미사’를 제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황 대표는 또한 “사회적 차별에 맞선 실천 내용 중에서 ‘토착화’를 향한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고 밝혔다.

“김 추기경님은 한국 교계설정 25주년 기념 토착화 심포지엄에서 토착화를 가로막는 주된 장본인이 바로 사제라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차별한다는 것은 우월의식과 곧바로 연계되지요. 김 추기경님은 하느님 안에서 한국의 문화와 현실을 올바로 포용할 때 진정한 복음화를 이룰 수 있다는 토착화를 강조하셨습니다.”

김 추기경의 영성에 대해 짚어가며 황대표는 “김 추기경님은 무엇보다 사제로서 자신의 존재를 걸고 자신이 먼저 증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사제들에게도 가르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있는 제물이 되어야함을 먼저 권고했다”고 밝혔다.

“김 추기경님에게서 본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모습은 그분이 타인에게만 올바른 뜻을 전하고 과제를 던져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과제를 갖고 살려고 노력하고 또 잘 살지 못했을 때에는 끊임없이 반성과 성찰을 이어가며 참 그리스도인이, 참 사제가 되려고 애쓴 점입니다.”

아울러 황 대표는 “우리도 김 추기경님에 대해 단지 아는 데서 멈출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그 뜻을 전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향을 모색하는데 힘써야 한다”며 “특히 김 추기경의 삶과 업적을 우상화로 그릇되게 이끌지 않고 그가 살았던 그리스도교의 영성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게 하기 위해 ‘영성의 문화화와 사회화’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성의 문화화와 사회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교회가 가장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서로 다른 문화들이 만나기 위해서는 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바닥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교회가 먼저 가장 아래로 내려가 이 사회와 만나고 ‘사랑의 사회’를 건설하는데 힘쓰는 것이 김 추기경님이 못다 이루신 뜻을 우리 모두가 채워가는 일일 것입니다.”

2005년 2월 인천교구 사제 평생교육 특강 중인 김수환 추기경. 김 추기경은 차별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모순을 개선하는데 가장 능동적이었는데, 특히 지배에 맞서서 사랑과 돌봄을, 차별에 맞서서 포용과 화해와 일치를 추구했다.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