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성 이나시오의 생애와 그 사업 (3)

강정우
입력일 2026-09-30 11:07:43 수정일 2026-09-30 11:07:43 발행일 1956-11-18 제 172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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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를 보다 큰 천주의 영광을 위하여

修學(수학)시대

『이나시오』는 모든 장해를 극복할 수 있는 애덕을 가졌으나 사람을 더 이해시키고 지도하는 훈련이 없었든 것입니다. 그의 청년시대는 궁정(宮庭) 생활에 바쳤든 것이므로 신학과 철학은 전여 무시했읍니다.

 

이에 그는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먹고 十二(12)세 정도의 귀족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에 입학하였으니 그때 나이는 三十三(33)세였읍니다.

 

초보부터 배우기 시작한 그는 어린아이들 틈에 끼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공부했으나 우수운 일은 그 크라스에서 제일 꼴찌의 성적이었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나시오』의 머리가 둔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해동안 초년시대의 학창생활에서 멀어져 있었고 그의 어른된 마음에는 젊은 아이들의 마음이 없었고 또 공부만 시작하려면 매양 묵상하였든 것입니다.

 

二(2)년후에 시험에 합격되어 『알칼라』대학에 입학하여 또 그다음해 여름에 『사라만까』대학으로 전학하고 一五二八(1528)년에 파리(巴里)대학에 들어갔으며 一五三四(1534)년 三(3)월 十四(14)일 파리대학에서 문학사의 학위를 받았으니 「바로세로나」에서 어린이들 틈에 끼어 첫 시작부터 공부를 한 늙은학생 『이나시오』는 그후부터 十二(12)년만에 학사호를 탔든 것이며 그동안 빈곤과 병고와 학문에 대한 인간적 염증은 그 고난을 제곱하였든 것입니다. 그러나 꾸준한 노력에 관하여 그가 말하기를 『이 十二(12)년간의 공부는 오직 천주께 봉사하기 위하여 자기자신에게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하였든 것이다』고 합니다.

 

예수회 창립 준비

『만레사』에서 천주께서 친히 『이나시오』에게 당신을 섬기는 회를 창립하라고 말씀하셨읍니다.

 

파리대학 재학시에 그는 그 사명을 위해 목숨바칠 동지를 찾고 있었으니 그 당시 파리에 유학중인 청년 『베드루 파아벨』이 최초의 추종자요 『프란시스코 사베리오』는 둘째번의 추종자였으며 다음에는 스페인계 유태인 『레이네츠』 『살메론』 『보다딜라』 그리고 『시몬 로드리게스』 등이 이에 호응했든 것입니다.

 

그리하여 一五三四(1534)년 성모몽소승천첨례날 대재와 기도뒤에 이들은 파리의 「몽말뜰」(치명자의 山(산)이라는 뜻) 산위에 있는 텅빈 성모성당에 모였읍니다. 그때에 『이나시오』는 동지들에게 성지의 지배자(회회교도들)를 회두시키자는 제안을 하니 이에 모든 동지는 그와더부러 이 위대한 일을 하기로 작정코 一五三七(1537)년에 『베니스』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이 소수의 단체는 『파레스티나』로 당장에 출발 못할 것 같으면 우선 바오로 三(3)세 교황을 받들기로 작정하였으니 이 교황은 어떤 목적으로든지 그들을 필요로 하였든 것입니다.

 

三(3)년은 빨리 지나서 一五三七(1537)년 一(1)월에 『이나시오』는 十八(18)개월 먼저 베니스에 도착하여 빈민구호와 교육사업에 종사하고 있다가 그의 동반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읍니다. 그해 로마에서 성주간을 지내고 교황 성하는 그들중에 신품받은 이에게는 전대사를 주는 권리를 주셨든 것입니다.

 

一五三七(1537)년 성 『요안 세자』 축일에 『이나시오』 외동지중에서 그때까지 신품받지 않은 이들에게 「아르바이」 주교가 사제품을 주었고 그다음해 연말에 성지로 가려든 것이 그곳의 회회교도들의 적대행위로 인하여 불가능하게 되었읍니다.

 

예수회의 목적

그때문에 로마의 중앙지에 집 한칸 빌려가지고 이 단체는 처음으로 교황의 위촉을 맡아 로마의 학교아동들을 교육지도하는 임무에 종사하였읍니다. 이때에 공식으로 회를 조직하는 새로운 필요성에 의하여 천주께 봉사함을 목적하는 이들로써 비로소 수도회를 창립하였으니 그 목적은 그리스도교적 교리와 그리스도교적 생활로 모든 영혼을 지도하고 도웁고 또 강론과 영조(靈操)와 이웃에 대한 친절한 행동과 특별히 청소년과 무식한 이들에 대한 교육사업으로써 봉헌된 수도단체로서 모든 회원은 정덕과 청빈과 순명의 허원과 또 교황의 명령을 절대 복종하는 허원까지를 포함한 엄숙한 서원을 하였든 것입니다.

 

一五四○(1540)년 九(9)월 二十一(21)일 예수회에 대한 교황의 정식인가 칙서가 내렸고 그후 七(7)개월 후에 『이나시오』는 본의는 아니었으나 만장일치로 추대되어 초대종신총장으로 되었읍니다.

 

그때에 『폴투갈』 왕이 인도(印度)에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해왔음으로 『방지거 사베리오』를 극동으로 보냈으니 이때가 『이나시오』가 『사베리오』를 이세상에서 최후로 본 것이었읍니다. 다른 동지들은 소위 “종교개혁파”에 항거하는 “종교 반개혁(反改革)운동”의 선봉이 되기 위하여 유럽 각지방에 파견하게 되었읍니다.

 

예수회원의 특별한 사도직은 교육사업이었으며 그들은 가는 곳마다 대학을 세웠읍니다. 『이나시오』의 성공적인 공세(攻勢)의 하나는 “루터주의”에 대항하여 로마에 독일인대학을 세운 것이었으니 이 대학에는 독일출신의 젊은 신자들을 양성하여 자기 모국에 돌아가 올바른 투쟁을 하도록 지도하였읍니다.

 

이 새로운 수도회는 병자를 간호하고 가난한 자를 먹이고 「페스트」가 유행하는 감옥의 죄수를 방문하여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바 실생활로써 교회를 강화(强化)하였든 것입니다.

 

이나시오의 공헌

그후 『이나시오』는 한평생 로마를 떠나는 일이 없이 바티깐과 부근에 머물러 전세계에 작전중에 부단히 성장하고 있는 이 새로운 수도회를 지도하였으며 질서와 오해와 싸우면서 기도중에 적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든 것입니다.

 

젊은 무사(武士)인 『이나시오』는 한번 천주께 대한 봉사에 헌신하자 자기 수도회를 군사적 노선(路線)을 본따서 자기는 그 부대장이 되어 부하를 사방으로 파견하여 대외적으로는 불신(不信)과 이단과 싸우고 대내적으로는 가톨릭 안의 무관심성과 세속주의에 대하여 용맹히 투쟁하였든 것입니다.

 

순명은 그의 특질이었으나 어떠한 군대에서도 강제할 수 없는 절대순명을 그의 회원에게 요구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예수회의 회원들은 그 명령을 자발적으로 복종하였을뿐 아니라 자기자신의 의지와 똑같이 받아들였읍니다.

 

十五(15)년동안 『이나시오』는 자기 부하를 지휘하였는데 그의 생전에 그의 부하가 一(1)천명 이상이 되는 것을 보고 서거하였읍니다. 그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와 남아메리카에 十二(12)관구를 갖게되었든 것입니다.

 

一五五六(1556)년에 그는 생리적으로 극단한 피곤에 빠지면서도 여전히 구령사업을 위해 노력하였읍니다. (계속)

 

사진설명 :

이나시오가 성모께 갑옷을 바친 몬트세라트山(산) 수도원(現景(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