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문화가 동반되지 않은 과학기술만의 진보는 위험한 것 교황 성하의 메세에지
그리스도의 지상(地上) 대리자로서 주야로 인류의 참된 행복과 평화를 위하여 근심하시는 교황 성하께서는 현재 전세계가 당면한 국제적 긴장상태(緊張狀態)와 정신문화(精神文化)가 같이 수반되지 않은 과학기술(科學技術)의 독주(獨走)적 발달이 낳은 여러 위험과 이로인해 생긴 여러 불행에 대하여 이를 지적하여 경고하시면서 참된 평화는 도덕(道德)에 기초를 둔 정신적일체(精神的一體)에서가 아니면 아니될 것과 각국(各國) 간에 생활수준의 간격을 적게하기 위해 협력하지 않어서 안될 것을 강조(强調)하여 말씀하신 다음 병든 「유우럽」의 문제에 말씀을 돌려 그리스도교 정치인(政治人)들에게 유우럽대륙의 정신적 통합(統合)을 지향(指向)하는 노력을 굳게 요청하시는 다음 같은 멧세에지를 발표하시었는데 이 멧세에지는 二(2)일간에 걸처 「러시아」 및 중국어를 포함한 二十四(24)개국 말로 전세계에 방송되었던 것이다.
빛나는 구속주의 요람(要覽) 옆으로
『암흑에 살고있던 백성은 큰빛을 보았나니』(아사이아 九 · 一(9 · 1)) 이사이아 선지자(先知者)의 영혼은 이 빛을 바라보면서 장차 오실 세기(世紀)의 아버지요 평화의 임금이신 천상아기의 땅위에 오심을 예고(豫告)하였던 것이다.
가톨릭 세계의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어두운 안개(霧(무))에 쌓인 이 세상에 탄생하여 오심으로 각세대(各世代)의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 이 아기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나는 크리스마스의 멧세에지를 여러분에게 보내여 다시 한번 빛나는 빛의 근원이신 새로 나신 구속주의 요람(搖籃) 옆으로 여러분을 안내하고저 한다.
어둠을 비치는 빛
참으로 암흑(暗黑)을 깨트려 암흑을 이긴 빛은 주님의 성탄이다. 요왕 종도가 그 복음서의 첫장에서 성탄의 본질적(本質的) 의미를 설명하여 처음으로 나타난 이 및에 다시한번 창세기(創世記) 제一(1)장의 장중함을 말하였다.
『말씀이 강생하여 사람이 되사 우리 사이에 거처 하신지라 우리가 그 영광을 보매 곧 성부의 독생성자의 당연한 영광이오』(요왕 一 · 一四(1 · 14))
생명 그 자체시오 빛 그것이신 그는 어둠 가운데 빛나며 그리하여 눈과 마음을 그에게 열어 『무릇 당신을 영접하며 겸하여 그 이름을 믿는 이에게 능을 주사 곧 천주의 자녀가 되게』(요왕 一 · 十二(1 · 12)) 하신다.
그러나 천주의 빛이 조잡(粗雜)한 외양간에서 다정하게 비쳐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灰(회))와 주검 가운데 영혼을 말라시들게 하는 저 원죄(原罪)로 인한 오래전부터 어둠 가운데 빠저있는 무서운 자유(自由)가 여전하게 인간에 남어있어 일부러 눈을 감고 신앙을 버림으로 약해진 사람들에게 있어 성탄은 단순한 인간적 축하로 내용없는 감정 세속적인 기념이 되고 있다. 성탄을 경하(慶賀)하는 기분은 있어도 그것은 알(實(실))이 없는 껍질만의 포장(包裝)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빛이 비치는 구속주의 요람의 둘레를 어둠의 지대(地帶)가 둘러쌓고 하늘로부터 온 비침에 눈(眼(안))의 빛을 잃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다. 사람이 되신 천주를 그들이 갖지 못했음이 아니다. 아니 이세상에 큰 모든 사람을 비치기 위한 빛은 있다. 많은 사람은 인간적인 이상(人間的(인간적) 理想(이상))과 업적(業蹟)의 단명(短命)한 빛에 마음을 빼앗겨 그들의 눈을 피조물(被造物)의 영역(領域)에만 쏟아 존재하는 모든 것 비로삼이오 조화(調和)며 마지막인 창조주에게 눈을 향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술의 진보
이 사람들에게 나는 말구유에서 비치는 『크나큰 빛』을 보여 무엇보다도 현대가 왜 천주의 것에 맹목(盲目)이며 무감각하게 되었는가 하는 원인을 깨닫도록 권고하고 싶다.
그 원인이란 이른바 『기술적진보』(技術的進步)에 대한 지나치게 때로는 독선적 평가(獨善的 評價) 그것이다. 이 진보는 처음에 있어서는 전능(全能)한 괴물(怪物) 행복의 분배자(分配者)로 여겨지고 다음에는 모든 기도(企圖)로 가장 대담한 정복(征服)에 이르기까지 추진(推進)되고 그리하여 일반사람들에게 인간과 인생(人生)의 최후의 목적(目的)인 것 같이 생각되어 종교적 영신적인 이상(理想)에까지 이를 대치(代置)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마치 지서(智書 十三 · 一(13 · 1)) 가운데 있는 보이는 세게로부터 존재(存在) 하신 자에게로 향(向)하지 못하고 그 업(業)을 보고서도 그 만드신 자를 발견하지 못했던 그 시대의 우상숭배자(偶像崇拜者)들이 매(鞭(편))의 옳지못한 교만은 현대사람들을 장님(盲人(맹인))으로 맨들고 귀먹어리로 맨드러버리는 것이 차차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햐여 어둠 속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인간의 본성(本性)을 초월(超越)하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루어진 초자연의 세계와 구속(救贖) 사업은 오늘날 더욱 깊은 어둠으로 닫쳐있다.
기술의 진보는 천주께로부터 그리하여 그것은 천주께로 인도한다
그러한 그른길(邪道(사도))로 들어서는 아니된다.나는 기술의 진보를 배척할려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인류의 진보를 장려하고 애호한다. 기술의 진보는 천주께로부터 온 것이다. 따라서 천주께로 인도할 수 있으며 또한 인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 기술의 진보 경의(敬意)를 표하고 피조물(被造物)과 자연의 힘의 인식(認識)을 보다 깊게 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하고 또 기계와 장비(補備(보비))를 자연의 지배를 위하여 인간의 이익과 지상생활의 풍요(豐沃(풍옥))를 위하여 천주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천주의 영원하신 성자(聖子)께서는 『모든 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시니라 대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다 저 안에 조성함을 받았다』(고로사이 一 · 十五-十六(1 · 15-16))는 것을 잘 알고 천주께서 주신 은혜로 감탄(感嘆)하고 이용하면서 주신 자에게 예배(禮拜)하기 위하여 이들 기술은 우리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으로 감득(感得)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기술의 놀라움을 부정(否定)한다든가 그 올바른 사용을 거부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믿는 사람들은 말구유에 누은 아기 앞에 마음으로부터 무릅을 꿇게 될 것이다. 지혜(智慧)와 물질을 주신 자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아니될 의무(義務)를 더욱 깨닫게 될 것이다. 『지극히 높은데서 천주께 영광이요』(누가 二 · 十四(2 ·14))하고 부르는 저 「베트레헴」의 찬가(讚歌)에 기술의 박자(拍子)를 즐겨 마추려고 할 것이다. 그들은 세 학자들이 천주이신 아기에게 드린 황금 · 유황 · 몰약의 선물 옆에 자연계(自然界)의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갓추게 되어 현대기술의 수획물(收獲物) 곧 기계와 수(數) 실험실과 거기서 발견된 것 동력(動力)과 자원(資源)도 천주의 명을 받아 미완성(未完成)이기는 하나 실현의 한거름 한거름식 걷기 시작한 모든 것을 받치게 될 것이다.
『심으고 땅에 충만케 하고 땅을 정복하라』(창세기 一 · 二八(1 · 28))고 하신 천주께서는 이 사명(使命)을 계승(繼承)하는 사람에게 피조물을 위탁(委託)하셨다. 이 천주의 명령을 얼마만큼이라도 수행했다고 할 수 있기 위해서 그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의 걸음은 얼마나 길고 험난할 길이었던가.
영광과 이용의 절정(絶頂)으로 향한 현대기술
참으로 오늘날의 기술은 인류가 물질세계를 지배함에 있어 그 전에 달성하지 못했던 완성(完成)으로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현대기계는 생산(生産)의 방법을 공급(供給)한다. 인간의 노동력(勞動力)을 크게 하고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 체력(体力)의 조건(條件)으로부터 해방(解放)하고 최대의 생산과 정확성(正確性)을 보증한다. 그리하여 더욱 연구를 깊게 최대한으로 이용하기 위해 진보의 여러 결과(結果)를 한곳으로 모아드려 자연자체(自然自體) 가운데에서 이러한 여러결과와 행복을 뽑아낸다. 기술의 결과로서 초래된 자연계의 능력의 위대하심과 그 예지(叡智)와 조화(調和)를 찾고 발견한다. 이렇게 생각되었던 기술을 비난하고 제재(制裁)를 가할 수는 없다.
기술이 영혼에 큰 해를 끼치는 위험인 『기술정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세계에 있어서 번영과 이용의 절정에 도달한 기술이 현실의 환경에 사람들의 협위(脅威)가 된 사실은 부인하 수 없다. 기술이라는 제단(祭壇) 앞에 부복한 현대인은 기술이 지식(知識)의 만족과 무한한 능의 약속을 해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현대기술의 넓은 용도(用途)와 그에대한 절대한 신뢰(信賴)는 다할 수 없는 가능성(可能性)을 약속하여 지금 사람들은 기술을 무한(無限) 그것과 혼동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 결과 어떤 사람들은 자율(自律)을 기술에 주어 『기술정신』(技術精神)이란 이름으로 인생관(人生觀)과 세계관(世界觀)을 바꾸어 버리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들은 인간과 인생의 최고 가치를 자연 가운데서 뽑아낸 힘(力(력))과 요소(要素) 그것이 인간에게 주는 이익에 두고 있다. 그리하여 기계생산의 기술을 인생의 목적으로 하여 그것 이외 다른 인간 활동보다 중대시하고 지상(地上)의 행복과 문화(文化)의 완성이 거기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시야(視野)를 물질에만 국한시키는 경향(傾向)
『기술정신』에 의한 비뚜러진 인생관 가운데는 근본적인 잘못이 있다. 현대인의 눈에 기술이 펴놓는 이 「파노라마」(迴轉畵(회전화))는 얼른 보기에 끝없이 넓어저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재(實在)하는 세계의 한 부분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 「파노라마」는 착각(錯覺)을 이르키게 하고 너무나 경솔하게 기술의 무한과 전능을 믿도록 하여 넓기는 하나 둘러싼 것이 있는 견딜 수 없는 본래의 기술정신으로 갈 수 없는 옥(獄)으로 사람을 가두어버린다. 그 시력(視力)은 무한의 실재(無限實在)에 다닫게 하기에는 너무나 약하고 물질밖에 보이지 않어 필연적으로 그 건너편을 바라볼 수가 없다. 여기서 어둠에 싸여 의지적(意志的)으로 맹인(盲人)이 된 현대사람들의 깊은 고민(苦悶)이 생겨온 것이다.
종교적 진리에 대한 맹목(盲目)
그러나 『기술정신』이 인간에 끼친 더욱 큰 피해는 이에 취(醉)할 때 종교나 초자연(超自然)의 진리를 의심하게 된다는 것에 있다. 복음사가(史家) 성 요왕은 이 어둠에 대해서 암시(暗示)하고 사람이 되신 천주의 말씀은 이 어둠을 쫓기 위해서도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의 어둠도 천주의 가르치심의 영적이해(靈的理解)를 방해할 것을 고(告)하고 있다.
기술 자체가 종교적 가치를 부정(不正)하는 것이 아니고 이론적으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오히려 종교의 발견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초자연의 진리와 선(善)을 찾고 구하지 않음 같이 보지 않도록 받아드리지 않도록 그러한 분위기(雰圍氣)에로 사람을 이끌어 넣는 것이 『기술정신』이다. 『기술정신』에 이끌린 사람들의 마음은 천주의 일에 대해서는 무감각 무관심 그리고 맹목(盲目)이 되어버린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든 현의(玄義)는 그 본성(本性)으로부터 기술과는 다르다. 『기술정신』에서 출발하는 때는 이 어둠의 사다리를 넘기 위해서 초자연적 실재(實在)에 관심을 갖도록 두배 노력을 한다 하드라도 헛일이다. 그 이유는 이 『기술정신』은 현재가 특히 갖은 안정성 없는 표면적 성격이 참된 비판력(批判力)을 갖은 사람을 맨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기술적 진리를 기뻐하는 사람들도 이것을 이 결과의 하나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기술정신』에 가득찬 사람들에게 사람이 되신 천주의 성자께로 인도하기 위한 고요함과 안정함과 내면성(內面性)을 찾기는 곤난하다. 만약 인간의 두뇌(頭腦)와 다른 기관(器官)의 활동력이 둔하여지고 필연적인 활동이 제한되고 계산(計算)과 공예적설계(工藝的設計)의 시행이 방해된다면 인간본성의 구성요소(構成要素)에 결함(缺陷)이 있다고 하고 드디어는 창조주와 그 사업읅 경멸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하물며 예컨데 영원의 말씀과 인간성이 하나로 된 성탄의 현의(玄義)는 기술에 대해서 생각되는 것 보다 무한이 높은 실재(實在)이며 위대한 것이라 하는 그러한 천주의 생명과 그 사업의 지극히 높은 현의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오로지 『기술정신』의 일방적인 그들의 방법과 도정(道程)을 걷고 수(數) 타산(打算)의 관계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은 실재(實在)로 인정않고 평가(評價)할려고 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실재(實在)를 그 원소(原素)로 분석(分析)했다고 믿고있으나 그들의 지식은 표면(表面)에 끝치고 한면(一面)밖에 도달하지 못했다. 기술방법을 진리탐구(眞理探求)의 유일한 길로 아는 사람은 예컨데 유기체생명(有機体生命)의 깊은 실재라던가 더욱 영적생명(靈的生命)의 실재 개성(個性)과 인간사회의 살고있는 실재(實在)에 깊이 드러가는 것을 단념하지 않으면 안되게 될 것이니 그것은 양(量)으로 분해(分解)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降生)과 구속(救贖) 천계(天啓)와 은총에 의하여 우리들이 받드는 이 숭고한 실재를 어떻게 해서 인간의 마음에서 기획(企劃)할 수가 있을 것인가? 『기술정신』에서 나는 것과 같은 종교적 장님이 아닌 한 사람은 적어도 얼마만의 생각을 천주께 대해서도 갖고 있으니 즉 천주의 모상으로 조성함을 받었기 때문에 천주는 무한하신 지혜이시다. 『기술정신』은 인간의 지혜발전을 인간 가운데 가두고 있다. 이러한 편협(偏狹)에서 구출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깊게 하기 위한 교육을 시작지 않으면 안될 뿐 아니라 일면적 영향(一面的影響)을 받은 생각을 고집하고 있었던 그것과는 반대의 종교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특히 말구유 앞에서 『그 넓이와 기리와 높이와 깊이가 얼마나 되는가를 깨닫고 모든 인식을 초월하시는 ㄱ릐스도의(우리에게 대한) 총애를 (옳게) 인식』(에페소 三 · 一八-一九(3 · 18-19))하기 위해 노력할 때에 편협한 지식은 타파되고 피조물은 차차 본빛을 받는다.
그반대로 기술의 시대가 된다면 최자연과 영원의 세계에는 적은 사람이 되는 희생을 감히 하면서 물질의 세계에 거인(巨人)이 되어 인간을 괴물(怪物)로 변하게 하는 큰일을 성취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