宣敎(선교)의 가톨릭 액숀
聖化(성화)라는 文字(문자)는 『聖(성)』을 指向(지향)한다는 目的(목적)과 그것을 橫的(횡적)으로만이 아니라 縱的(종적)으로 上昇的(상승적)이며 또한 漸進的(점진적)으로 活動(활동)하는 것이라는 運動(운동)의 樣式(양식)을 뜻하고 있다. 곧 우리의 運動(운동) 『俗(속)된 것』을 皮相的(피상적)으로 우선 否定(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內部(내부)로부터 그리고 下部(하부)로부터 漸次(점차)로 育成(육성)하고 完成(완성)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永遠(영원)』히 上昇(상승)하는 革命(혁명)』인 것이다.
우리는 또한 非(비)가톨릭者(자)의 生活(생활)에 대해서 最大(최대)의 寬容(관용)과 함께 새로운 改宗者(개종자)가 거기서 마음의 故鄕(고향)을 느끼는 것 같은 雰圍氣(분위기)를 釀成(양성)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完德(완덕)을 說明(설명)하는 가톨릭시즘은 우리에게 超自然的(초자연적)으로도 보다 더 完全(완전)하기를 그리스도者(자)임과 함께 더욱 完全(완전)한 自然的(자연적) 人間(인간) 市民(시민) 學生(학생) 社會人(사회인)이 될 것을 要求(요구)한다. 完全(완전)한 그리스도者(자)는 또한 더욱 完全(완전)한 社會人(사회인)이 되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보다 더 完全(완전)한 社會(사회)이라면 當然(당연)히 社會(사회) 純化(순화) 改善(개선)에 努力(노력)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者(자) 이는 가장 社會主義(사회주의) 社會(사회)의 福祉(복지)에 觀心(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非(비)가톨릭者(자)에 接(접)하는 態度(태도)도 그리스도者(자)이기에 앞서 우선 적어도 人間(인간)다운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여서는 안된다. 벗이(朋友(붕우)) 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者(자) 되는 것이다. 大衆(대중) 사이에 있어서 友情(우정)과 尊敬(존경)으로써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發見(발견)할련느 友情(우정) 이런 것은 神(신)과 同胞(동포)에의 사랑의 誡命(계명)을 온전히 하나인 모상에 있어서 보여주는 友情(우정)이다.
그러한 友愛(우애)의 雰圍氣(분위기) 속에서 大衆(대중)은 얼마나 自然(자연)스럽게 그리스도敎的(교적) 共同体(공동체)에의 親愛(친애)를 느낄 것인가! 또한 얼마나 많은 열매(果實(과실)) 맺는 結實(결실)이 생길 것인가! 우리는 사람의 마음 속에 간직한 神秘(신비)에의 동경을 滅却(멸각)시킴이 없이 이것을 새로운 共同体(공동체) 속에서 完成(완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初代(초대) 그리스도敎會(교회)에 있어서 規模(규모)는 적었을망정 社會(사회) 안에서 참된 그리스도敎的(교적) 超自然的(초자연적) 生命(생명)에 사는 共同体(공동체)가 있고 또한 求道者(구도자)도 그 채로를 받아드려 徐徐(서서)히 敎育(교육)하는 共同体(공동체)가 있어 이들 어느것이나 熱㤠(열열)한 友愛(우애)로 맺어지며 神秘的(신비적) 一致(일치)의 人間的(인간적) 表現(표현)에 살며 늙은이 어린이 男女(남녀)의 區別(구별) 없이 모두가 假定的(가정적) 集合(집합)으로서의 雰圍氣(분위기)로써 團結(단결)하고 같은 典禮(전례)에의 參與(참여)에 있어서 깊게 一致(일치)되어 있었음이야말로 異敎徒(이교도)로부터 『그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라』고 말해진 것이다.
現代(현대)의 가톨릭 액숀은 새로운 環境(환경) 아래서 모든 現代的(현대적) 手段(수단)으로써 그 有效(유효)성을 保證(보증)해야겠는데 여기에 또한 깊은 歷史的(역사적) 敎訓(교훈)을 發見(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가톨릭 액숀의 究極目標(구극목표)인 『그리스도의 支配(지배)에 依(의)한 그리스도의 平和(평화)(Pax Christi in regno Christi)를 오늘의 社會(사회)에 實現(실현)하기에는 勿論(물론) 그리스도敎(교)를 보다 더 生活(생활)한 것 包攝的(포섭적)이며 人間的(인간적)인 것으로 하며 모든 生活面(생활면)에 浸透(침투)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者(자)를 啓發(계발)하고 養成(양성)하는 것으로서의 『聖堂區中心(성당구중심)의 가톨릭 액숀』(Acti n cat oique par issial)의 任務(임무)는 決(결)코 잊어서 안되는 것이나 더욱 自然的(자연적) 生活(생활)에 適應(적응)하여 그 生活(생활)의 形式(형식) 위에 세워저 그 속에 超自然生命(초자연생명)의 빠씨(酵母(효모))를 간직하고 있음 같은 그리스도敎的(교적) 共同体(공동체)를 樹立(수립)하려는 『宣敎(선교)의 가톨릭 액숀』을 必要(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한 가톨릭 액숀은 아직 전혀 福音(복음)을 모르는 數(수)많은 大衆(대중)과 그 社會(사회)에 眞理(진리)와 光明(광명)을 傳(전)파하려고 함으로 宣敎(선교)의 가톨릭 액숀이라 불리우는 것이다. 勿論(물론) 宣敎(선교)의 가톨릭 액숀이 생기기 위해서는 小敎區(소교구)의 生活(생활)은 疏忽(소홀)해지는 것이 아니라 信徒(신도)들은 有機的(유기적)으로 結合(결합)되며 그 生活(생활)은 액숀 對備(대비)하여 刷新(쇄신) 强化(강화)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宣敎(선교)의 가톨릭 액숀이 小敎區(소교구)를 버서나 世上(세상)에 改化(개화)할 것이라면 그것은 먼저 小敎區(소교구) 속에 깊이 드러갈 것이며 거기서 出發(출발)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열 사람의 가톨릭 工員(공원)이 있어 그들은 각각 다른 敎區(교구)(本堂(본당))에서 미사에 參與(참여)하고 聖事(성사)를 받고 있으나 한 工場(공장)에서 同(동)으로서 일하며 쉬는 時間(시간)을 지낸다면 그 工場(공장)이야말로 宣敎(선교)의 가톨릭 액숀의 곳(場所(장소))이며 그곳에서 그리스도敎的(교적) 共同体(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이다. 때로 만나는 살팜들에게 改宗(개종)을 勸(권)하기 보다도 언제나 生活(생활)을 함게 하는 사람들 사이에 곧 自然的(자연적) 共同体(공동체) 속에 그리스도敎的(교적) 共同体(공동체)를 만드는 便(편)이 훨신 豊盛(풍성)한 救援(구원)의 結實(결실)을 갖어오며 또한 그것이야말로 現代(현대)의 必要(필요)로 하는 것임은 事實(사실)이 證明(증명)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