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社說(사설)] 「그리스마스」 祝賀(축하)의 積極面(적극면)과 消極面(소극면)

강정우
입력일 2026-09-02 11:48:24 수정일 2026-09-02 11:48:24 발행일 1955-12-25 제 162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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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거듭할수록 우리나라에서도 「그리스마스」를 祝賀(축하)하는 各種(각종) 行事(행사)가 더욱 盛大(성대)하게들 開催(개최)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誕生(탄생)을 기뻐하는 「그리스마스」가 그리스도精神(정신)을 全然(전연) 度外視(도외시)한다던가 또는 그리스도는 追放(추방)해 버린 말하자면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마스』가 된다면 이것은 하나의 邪道(사도)가 아닐 수 없다. 몇해前(전)부터 美國(미국)서는 『그리스마스를 그리스도께로 돌려라』 하는 運動(운동)이 이러났다 한다. 이러한 것은 그나라에 있어 『그리스마스』가 百貨店(백화점)의 商品廣告(상품광고)로부터 始作(시작)하여 술과 춤으로 끝나버리고 마는 傾向(경향)이 있기 때문에 가톨릭敎會(교회)로부터 發(발)하여진 抗議(항의)라 할 것이다.

 

우리나라 社會(사회)에 있어서도 요즈음 『그리스마스』가 急速度(급속도)도로 民衆的(민중적)인 名節(명절)로서 祝賀(축하)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좋은 現象(현상)이라 할 수 있으나 한편으로 이러한 傾向(경향) 가운데에는 亦是(역시) 商店(상점) 「쇼오윈도」와 「파아티」가 큰 役割(역할)을 하고 있는 듯 하기 때문에 우리들도 이 나라 社會(사회)에 있어서 『그리스마스를 그리스도께로 돌려라』 하는 運動(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오히려 『그리스마스에 그리스도를 맞어드리라』고 해야할 것이니 『돌려라』 하는 것은 過去(과거)에는 있었지만 現在(현재)는 잃어버린 것에 對(대)한 도로 찾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事情(사정)은 이와는 달라 우리나라 社會(사회)에서 現在(현재) 民衆化(민중화)되어가고 있는 「그리스마스」는 아직 한번도 그리스도를 모셔본 적이 없는 말하자면 처음부터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마스』였기 때문이다.

 

實際(실제)로 요즈음 몇해동안 우리社會(사회)가 걸어온 길을 더듬어 볼 때 우리나라 社會(사회)의 그리스마스의 民衆化(민중화)는 義理(의리)만 이리도 그리스도敎(교)의 信仰(신앙)을 通(통)하여 얻어진 것이라고 할 수 없다. 八·一五(8·15)解放(해방) 後(후) 『新敎(신교)의 自由(자유)』는 確實(확실)히 그리스도에 對(대)해서 大幅的(대폭적)인 「敎勢(교세)」를 許容(허용)한 것은 事實(사실)이다. 그러나 純粹(순수)한 宗敎的(종교적) 收獲(수획)은 얼마나 되는지 未知數(미지수)인데 그리스마스 民衆化(민중화)의 素因(소인)은 敎勢(교세)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外勢(외세)에 잇는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 가톨릭信者(신자)들이 우리의 豫想(예상)보다 빨리 民衆化(민중화)한 그리스마스 行事(행사)를 두고 생각할 것은 그것이 罪(죄)가 아닌 限(한) 反(반)그리스도敎的(교적)이 아닌 限(한) 그것이 純粹(순수)히 精神的(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해서 排斥(배척)한다던가 꺼릴 必要(필요)가 조금도 없는 것이며 오히려 여기에 우리가 大担(대단)하게 積極的(적극적)인 面(면)을 家(가)하여 참된 祝賀(축하) 方法(방법)과 그리스마스의 치ᅟᅡᆷ된 精神面(정신면)을 外敎人(외교인) 同胞(동포)들에게 알리도록 努力(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런 点(점)에 있어는 푸로테스탄側(측)이 우리보다 먼저 活動(활동)을 開始(개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마스의 참된 意義(의의)를 가르칠만한 適任者(적임자)라고 認定(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니 『사람의 되신 天主(천주)』에 對(대)한 敎義的(교의적) 確信(확신)마저 흔들리고 있는 傾向(경향)이 엿보이는 그들에게는 첫째 미사가 없음으로 『그리스도의 미사』로부터 由來(유래)하는 『그리스마스의 뜻을 풀어밝힐 資格(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萬民(만민)이 즐거워 할 바 큰 기뿜』(누가 二 · 十(2 · 10))을 널리 告(고)하여야 할 使命(사명)을 갖은 가톨릭이라면 市民(시민) 앞에서 莊嚴(장엄)한 미사聖祭(성제)를 올리고 그 奧妙(오묘)한 意義(의의)를 가르침으로서 참답게 理想的(이상적)인 「그리스마스」를 慶祝(경축)할 수가 있을 것이며 이러한 方法(방법)으로 그리스도를 異敎人(이교인) 市民(시민)들 가운데로 모셔내 이것이 不可能(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現代(현대)라는 이 世代(세대)는 마치 「롬발디」 師(사)가 『現代(현대)의 信仰(신앙)』 가운데 指摘(지적)한 바와 같이 『自由(자유) 찾어서 그 아버지(神(신))의 집을 뛰어나온 蕩兒(탕아)가 어버이의 膝下(슬하)를 떠난 그것이 바로 타락의 길을 걷게되어 마침내 남의 奴隷(노예)로 轉落(전락)하게 된 것을 깨닫고 이제 다시 그 아버지(神(신))의 집을 그리워하고 있어』 家長(가장)인 그리스도와의 感激(감격)스러운 相逢(상봉)을 볼 수 있게끔 된 오늘에서랴!

 

이러한 『相逢(상봉)』을 特別(특별)한 機會(기회)에 計劃(계획)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마스」로서 가장 敵黨(적당)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 아닐까?

 

韓國(한국) 가톨릭이 一年(1년)의 大部分(대부분)을 敎會(교회)안에 들어앉아 그곳에 사람을 불러드려 敎理(교리)를 가르치는데 別(별)다른 異意(이의)를 갖는 것이 아니지만 이 「그리스마스」 하로쯤은 앞서 말한 民衆的(민중적)인 活動(활동)을 해봄즉한 일이 아닐까.

 

다시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韓國社會(한국사회)의 그리스마스는 일직이 그리스도를 맞아드린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맞아드리도록 힘쓰지 않으면 아니될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