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아들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며 가녀리고 예쁘장한 엄마가 학원을 찾아왔다. 다음 날, 학원에 온 아이는 자그마하고 귀여웠지만 눈을 맞추지 않았다. 종이와 미술 도구를 건네자 지우개 달린 연필로 한 점을 힘껏 찍고 그 주변만 맴돌았다. 선이 겹치면서 종이는 이내 찢어졌다.
엄마에게 늘 이렇게 그리느냐고 묻자, 그는 몸을 움츠리며 눈물을 흘렸다.
“자폐예요. 치료받고 있어요. 의사 선생님이 그림을 그리게 해 보라고 하셔서…”
미술치료라는 말조차 낯설던 때였다. 자폐에 관한 책을 사서 읽었지만 망망대해에 홀로 배를 띄운 기분이었다. 전문 분야가 아니라며 머뭇거리자 엄마가 말했다.
“아이가 여기 오는 걸 좋아해요.”
그렇다면 가르치려 들지 말고 이곳을 놀이터로 만들어 주자고 마음먹었다. 아이들에게 영화 <나의 왼발>도 보여 주며 친구의 그림이 자신들과 달라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했다.
처음에는 나도 아이의 가정환경에 원인이 있을 것이라 섣불리 짐작했다. 모든 어려움을 사랑의 부족으로 설명하려던 나의 편견이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원인을 단정하는 일이 아니라 그 아이의 방식으로 세상과 만날 수 있도록 기다리는 일이었다.
아이는 매일 무언가를 끄적였고 종이에 구멍도 내고 어느 날은 구멍 나기 직전에 멈추기도 했다. 종이 열 장을 포개 주면 끝까지 이어진 터널을 만들었다. 나는 재질과 색이 다른 종이를 건네고 크레파스와 파스텔, 물감도 마음껏 만지게 했다. 구멍을 내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 다른 표현 방식이라고 함께 받아들였다. 얼마 뒤 아이는 까만 점의 동굴을 벗어나 벌레가 기어가듯 가느다란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점에서 선으로 가는 길은 눈물겹게 긴 여정이었다.
아이에게는 ‘띵동’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띵동, 누구세요?”가 아이가 유일하게 되풀이하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입시반 형과 누나들은 “띵동이 왔구나”, “띵동이 화가네”라며 반겼다. 띵동이는 차츰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며 호기심을 보였다.
부모와는 아이의 하루를 쪽지로 주고받으며 변화를 살폈다. 좋아하는 연필과 여러 재료를 활용해 집착을 억지로 떼어 내기보다 다른 놀이로 넓혀 갔다.
가을 야외 전시회에는 띵동이의 작품 여러 점이 걸렸다. 자폐 사실을 모르는 입시반 선생님들이 직접 고른 그림이었다. 다른 아이들과 너무 달라 걱정했던 특징이 작품에서는 독보적인 개성이 됐다.
전시 마지막 날 새벽, 비가 내려 그림을 걷으러 갔더니 띵동이와 엄마가 서 있었다. 아이가 그림을 보러 가자고 졸랐단다. 두 사람은 작품을 걷는 일까지 도왔다. 빗속에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나도 울었다. 엄마의 얼굴에도 빗물 같은 눈물이 흘렀을 것이다.
초등학교에 갈 무렵 띵동이는 특수학교에 진학하며 이사했다. 작별 인사를 하러 온 아이를 꼭 안아 주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25년 동안 수천 명의 아이를 만났지만 유독 띵동이가 떠오른다. 내 아이를 위해 기도할 때면 띵동이도 함께 기억했다. 하느님께서 그 아이를 이 세상에 보내신 뜻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글 _ 추명희 제르트루다(수원교구 가톨릭미술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