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十一月 七日(11월 7일)은 現在(현재) 大邱市桂山洞二街(대구시 계산동 2가)에 자리잡고 있는 大邱敎區主敎座大聖堂(대구교구 주교좌 대성당)이 建立(건립)되어 獻堂(헌당)된 지 五十週年(50주년)에 該當(해당)하는 날이다.
即(즉) 그리스도의 福音(복음)이 이 땅에 드러오고 當時(당시)의 愚昧(우매)한 政府(정부)는 黨派(당파) 싸움에 利用(이용)되어 一八〇一(1801년)년에 禁敎令(금교령)을 내리고 一八八二年(1882년) 韓美條約(한미조약)이 締結(체결)되기까지 以來(이래) 八十年間(80년간) 끔직한 迫害(박해)의 血史(혈사)가 展開(전개)되여 수많은 殉敎者(순교자)를 내게 하였으며 國令(국령)으로 禁敎令(금교령)은 解除(해제)되었다고 하나 地方(지방)에 있어서는 私迫害(사박해)가 끊어지지 않아 外國人神父(외국인 신부)들은 韓國喪服(한국 상복)으로 變裝(변장)하고 한참 동안 隱遁生活(은둔 생활)을 하면서 徐徐(서서)히 때를 더 기다리고 있어야 할 때였다
一八八六年頃(1886년경) 大邱敎區創設(대구교구 창설)의 使徒(사도)이시며 大邱敎區設定(대구교구 설정)의 基盤(기반)을 닦으신 大功勞者(대공로자)인 故(고) 「로벨도」(金保錄(김보록)) 神父(신부)께서 現(현) 漆谷東明面得明洞(칠곡동 명면 득명동)인 「신나무골」 敎友村(교우촌)에 隱居(은거)하면서 大邱(대구)로 進出(진출)할 機會(기회)를 엿보시던 中(중) 大邱邑中(대구읍중)에 사는 교우를 만나 大邱邑內(대구읍내)에 敎友(교우) 몇 家戶(가호)가 있다는 것을 듯고 一八八九年(1889년) 大邱近處(대구 근처)인 「새방골」(現竹田洞(현 죽전동))로 居處(거처)를 옴겨 臨時聖堂(임시성당)을 꾸미고 夜間(야간)을 利用(이용)하여 大邱邑內(대구읍내) 교우들을 訪問(방문)하시면서 傳敎(전교)하시다가 一八九一年(1891년)에 大邱邑內(대구읍내)로 進出(진출)하게 되어 「대-불」에 있는 정圭鉉氏宅(정규현씨댁)에 臨時處所(임시처소)를 定(정)하고 聖堂建立(성당건립)할 基地(기지)를 찾던 中(중) 現桂山洞(현 계산동)인 「남산」에 基地(기지)와 草家(초가) 몇 間(간)을 買入(매입)하여 純韓國(순한국) 建築樣式木造瓦家(건축양식 목조와가)에 彩色(채색)을 加(가)한 十字型聖堂(십자형 성당)을 建築(건축)하여 一八九八年(1898년)에 韓國敎會第八代主敎(한국교회 제8대 주교)인 故(고) 「뮤-텔」(閔(민)) 主敎(주교)의 執典(집전)으로 獻堂式(헌당식)이 舉行(거행)되었던 것이나 그後(후) 一九〇一年(1901년)에 뜻하지 않은 火災(화재)로 燒失(소실)되고 當時(당시)의 大邱敎會(대구교회)의 敎友中(교우중) 重鎭(중진)이던 徐相燉(서상돈) 金鍾學(김종학) 정圭鉉(정규현) 韓潤和 氏等(한윤화 씨등) 有志(유지)들이 金神父(김신부)를 도아 西洋式煉瓦製(서양식 연와제)의 現在(현재)의 桂山洞聖堂(계산동성당)을 新築(신축)하여 一九〇二年十一月七日(1902년 11월 7일)에 祝聖式(축성식)을 舉行(거행)하고 一九一二年六月十一日(1912년 6월 11일) 大邱敎區初代主敎(대구교구 초대주교) 故(고) 「플로리아노」 安主敎(안주교)의 成聖(성성)과 大邱敎區(대구교구)의 設定(설정)으로 一九一八年(1918년)에 增築工事(증축공사)를 加(가)하고 以來(이래) 大邱敎區(대구교구)의 主敎座聖堂(주교좌성당)으로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 뜻깊은 記念日(기념일)을 맞이하여 桂山洞敎會信者有志(계산동교회 신자 유지)들은 三千餘萬圓(3000여만원)을 據出(거출)하여 聖堂(성당) 안 信者席(신자석)에 千餘名(1000여명)의 人員(인원)이 안질 수 있는 장게机(궤)과 椅子(의자)를 設置(설치)하였으며 十一月九日主日午前九時半(11월 9일 주일 오전 9시반)에 大邱敎區第五代敎區長(대구교구 제5대 교구장) 崔(최덕홍)요안 主敎(주교)님의 執典(집전)으로 記念大禮(기념대례)미사가 奉獻(봉헌)될 것이며 其外(기외)에 記念式(기념식)이 舉行(거행)될 豫定(예정)이라 한다
(사진은 「로벨도」 神父(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