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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초록」…가난한 섬 ‘제주’에 희망 심은 임피제 신부 여정

이주연
입력일 2026-05-13 08:44:07 수정일 2026-05-13 08:44:07 발행일 2026-05-17 제 3491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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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돌 목장 역사와 비전 담아
황무지를 초록빛 낙원으로…제주를 살린 사랑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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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 지음/사진 준초이/328쪽/2만3000원/남해의봄날

1953년, 스물다섯 살의 아일랜드 신부가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임피제 신부(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1928~2018)였다. 거리의 아이들이 “미국 놈, 미국 놈” 외치며 손가락질했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다가가 또렷하게 말했다. “나는 미국 놈 아니에요. 아일랜드 놈이에요. 그러니 아일랜드 놈이라고 불러 주세요.” 아이들이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뜨리며 뒤를 졸졸 따랐다. 그렇게 임 신부와 한국의 인연이 시작됐다.

이듬해 4월 11일, 그는 제주교구 한림본당 초대 주임으로 제주항에 발을 내디뎠다. 64년 제주살이의 첫걸음이었다.

책은 임 신부가 제주에 도착한 때부터 이시돌 목장의 탄생과 현재에 이르는 70여 년을 담았다. 한 사람의 전기를 넘어,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의 역사와 제주의 근현대가 어떻게 이시돌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는지 그 흐름을 좇는다. 한국전쟁과 4·3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가난하고 고립된 섬에서, 그는 선교보다 주민들의 삶을 먼저 살폈다. 굶주린 이들에게 필요한 건 복음 이전에 자립의 뿌리를 내릴 힘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척박한 환경의 제주는 고향 아일랜드 ‘도니골’과 닮아 있었다. 기근과 전쟁을 겪은 아일랜드, 그 북부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자란 그는 ‘최소한의 삶의 조건’이 얼마나 소중한지 몸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이시돌 목장은 황무지였던 제주 중산간을 드넓은 초원으로 바꿔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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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제 신부가 제주 바닷가에서 잠수복 차림의 해녀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남해의봄날 준초이 제공

4월 초면 갈색빛이 더 많던 지역이었지만, 이시돌 목장의 들판만큼은 유독 푸른 목초가 풍성하게 자랐다. 축사에는 2만 마리에 가까운 돼지들이, 들판에는 수천 마리 양이 한가롭게 풀을 뜯었다. 그 돼지들이 홍콩과 일본으로 수출된다는 사실은 당시 정부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양모 니트 브랜드 한림수직은 천 명이 넘는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열어 주었다.

이시돌 목장의 개척 농가 프로젝트는 주택 공급에 그친 정부 사업과 차원이 달랐다. 주택은 물론 창고와 돈사 등 부대시설, 넉넉한 토지와 가축을 처음부터 내주고 축산과 목초지 관리 교육까지 함께했다. 농가마다 주어진 땅 3만 평을 손수 개간해야 하는 부담 속에서도 주민들은 그 땅 위에서 스스로 뿌리를 내렸다.

임 신부는 제주 사람들의 생애에 맞춰 관심을 넓혀 갔다. 20~40대에는 빈곤 탈출과 경제적 자립에 힘썼고, 50대 이후에는 복지로 눈을 돌렸다. 60대에 접어들었을 때, 처음 인연을 맺었던 제주 사람들이 황혼을 맞고 있었다. 그는 호스피스 병동 정착을 마지막 사명으로 여겼다.

바닷가에서 임 신부를 알아본 해녀 할머니들이 이산가족 상봉하듯 만나는 장면. 한 할머니가 던진 말이 오래 남는다. “임피제 신부님이 밥을 먹게 해 주셨지.” 세끼 밥, 그 한마디에 깊은 사랑과 고마움이 응축돼 있다.

평생을 제주와 함께 늙어간 임 신부와 이시돌 목장의 사연은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을 심고, 함께 빈 들판에 씨앗을 뿌려 낸 결실이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초록을 피워냈다. 임 신부가 생전에 가장 뿌듯하게 여긴 것도, 황무지였던 제주의 땅을 초록으로 물들인 일이었다.

책 말미에는 현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 이사장 이어돈 신부(마이클 조셉 리어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의 인터뷰를 통해 21세기 이시돌의 변화와 비전을 담았다. 사진작가 준초이가 생전 임 신부를 촬영한 화보와 글도 수록됐다. 도서 판매 수익금 일부는 이시돌 복지의원에 기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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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제 신부가 이시돌 목장 축사에서 소와 눈을 맞추고 있다. 남해의봄날 준초이 제공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