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뜻 아니한 上海(상해) 걸음 거긔서 어든 나의 感想(감상) (2)

강정우
입력일 2026-04-08 11:07:37 수정일 2026-04-08 11:07:37 발행일 1931-09-01 제 54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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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긔 여긔야말로 일본성교사의 첫 페-지가 시작되는 곳이요 그 교회의 문이며 원산지다. 뿐만 아니라 만흔 치명자들의 뜨거운 피로 붉게 물들린 성지며 일본에 대한 카톨릭왕국이다.

 

十日(10일) 아참일즉 일어나서 십분이내에 길인 주교성당에 가서 미사를 맛친 후 하야사까 주교와 해교구의 총대리신부는 마참 전 교황사절 자르듸니 각하의 송별차로 상경하신고로 뵈옵지 못하고 오직 그 성당의 주임이요 장긔교구의 재무인 우메기(梅木) 신부를 맛나 잠깐 인사한 후 밤새도록 굶은 배에 짐을 실으려 당가식당으로 발을 옴겻다. 조반후에 흐-재 신부의 안내로 자동차를 몰아 방문을 나섯다. 첫 방문이 사도학교여서 들어가 문을 두다렷더니 선생 한 분과 신부 한 분이 나와 우리 일행을 맛는대 그 친절은 이때끗 맛보지 못하던 것이러라. 응접실에서 주과의 대접을 바든 후 교실 성당 침실 등을 두루 구경하고 그곳을 물러나와 우라가미(浦上)신학교로 차머리를 돌렷다. 우라가미는 장긔시로 편입된지 오래지 못한 광계상 도로가 협착하야 자동차가 겨우 비비대고 갈만하더라. 이 신학교는 현재는 신학교로 사용치 안코 오직 방지거회 수사들이 림시로 사용학소 잇는데 문안을 들어서니 종색기(小鍾) 하나가 달렷기로 첫더니 그 소리에 응하야 살창문이 살작 열리면서 빼꼼이 내다보는 이가 잇기로 차자온 연유를 말한 후 내 혼자 생각하기를 『야, 그 수사들 내외도 어지간이들 하네 봉쇄수도원이 잇다더니 여긔가 거긔나 아닌지? 앗차! 만일 그러타면 마고 들어온 것이 안되엇는데! 그러나 식과 절차를 다차렷스니 촌떡이 처름 불불 떨것이야 잇나』 하고 잇스려니까 원장과 수사 한 분이 나왓는데 내외는 커녕 악수까지 하더라. 여긔서 바든 대접은 주과구자를 함께 쓰지는 못하겟고 오직 주(酒)자만 쓰게 되엇다. 술 못먹는 자랑들을 늘어노튼 여호, 토끼, 두껍이 류에는 못들어가도 술못먹는다는 자들의 자리에서 말석을 차지하라 하면 좀 설워하는 나로서 잠만 작고 안젓섯다가 끗흐로 시찰이 나오듯이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구경한 후 우라가미 신학교를 물너서 오던 길로 돌처 나오다가 서울 약현과 방불한 위치를 잡고 잇는 우라가미성당에 가니 위치도 조커니와 건물도 훌늉하야 주교대성당은 주교를 뫼신 덕택으로 큰댓자를 어덧지만 크기로나 내부 외모할 것 업시 모도가 이 성당만 못하더라. 그럭저럭 점심 때가 된고로 일본 二十六(26)성인들이 십자가에 달려서 뜨거운 피로 축성한 성지를 쳐다보면서 당가로 돌아왓다. 해성중학과 수녀원 등 방문은 상해서 돌아올 긔회로 밀우고 오후는 침상과 벗을 하다가 이 말못하는 친구에게 진절이가 난다는 말하는 벗을 차자 신학교로 향하얏다. 교사(校舍)는 목제화 양식인데 안밧모양이 늙은 태가 주르르 흐르며 귀한 일꾼들을 자긔품에서 양성하기에 로심초사로 이 모양이나 주인이 바꾸이는 판에 새 힘을 어덧다는 듯하더라. 산구(山口) 신부를 맛나 신학교 형편과 교구사정을 서로 주고 밧다가 머릿속 령행은 로마까지 가게 되여 로마에 류학하던 조선학생들의 찬사를 들을 때는 일편으로는 즐거우면서 일편으로는 애닮고 원통함을 금치 못하얏다. 당가에 돌아오니 풍우가 대작하야 고닮흔 몸에 래일 배탈 걱정까지 하게 되엇스나 하로 고생뿐이라는 걸로 위로를 삼앗다.

 

十一日(11일) 이날은 미사도 못드리고 누엇다가 주교께서 밤새 돌아오섯다는 소식을 듯고 그곳 주인을 차자뵈와야 하겟기로 병구를 끄을고 갓더니 일본사람들의 특색인 친절은 여긔서도 맛보앗거니와 몃해전에 교황사절 비서로 조선에 오섯슬 때에 二·三(2·3)일 가티 지나며 롱담하시던 그 어른은 아닌듯이 점잔하시더라. 오후 한시에 배가 떠난다 하기로 선창에 나아가니 어제 걱정하던 것이 추호나 틀릴까 몹쓸 바람이 바다의 오장을 뒤집엇던지 성이 상투끗까지 차오른 바다는 힌겁픔을 토하며 키대로 일어서서 내닷는 품이 온세상을 집어삼킬듯 십더라. 하는 수 업시 명일 아참 일곱시로 연긔하고 다시 돌아왓다.

 

十二日(12일) 아참 일즉 미사를 드리고 부두에 나가서니 우리가 제일 끗치라. 사다리를 거두고 닷줄을 감아 상해로 뱃머리를 돌렷는데 선창에 전송자들과 배안의 선객들 사이에는 몃백개 욹읏붌읏한 줄이 느리웟더라. 눈생기고 처음 보는 일이라 미신에 유명한 섬 량반들이 무슨 고사나 지내는 것이나 아닌가 햇더니 알고보니 참아 서로 못떠나는 정사(情絲)러라. 이 배는 상해 장긔간 련락선으로 일홈은 상해환이요 돈수는 五千五百(5천5백)돈이며 등급은 一三(1, 3)등 뿐인데 하단에는 우편소, 중단에는 식당, 상단에는 음악실, 도서실, 흡연실, 유희실 등이며 상갑판에는 운동장이러라.

 

十三日(13일) 오전 칠시에 황포강(黃浦江) 어구에 들어가니 일홈과 가티 흙탕물인데 이 강이야말로 조선성교회와 인연 깁흔 강이다. 거금 八十六(86)년전(一八四五(1845)년)에 조선의 자랑거리요 우리교회의 빗치며 영광인 안드리아 김 신부께서 노를 저어 올라가시던 그 강물이다. 그때 형편을 회고하면 새순이 터나오던 포도원을 물주고 김매시던 삼 위 주교 신부는 자긔들의 뜨거운 피로 마자막 물을 준 긔해년 군난을 치룬 후라 울도 담도 업는 주인 일흔 우리 성교회 포도원 은산 도야지떼의 거처가 되어 줄기 닙새할 것 업시 포도뿌리까지 끈허먹히던 때이엇다. 이가티 참혹한 처지에서 우리를 건저낸 장군은 오직 우리 용감한 안듸리아 김 신부엿스니 一八四五(1845)년 오월경에 일엽편주에 몸을 실고 붓대만 잡고 잇던 부드러운 손으로 억센 노를 잡아 흔들어 구사일생을 하시면서 황해를 건너서 이 강물을 휘어올라 오송(洖松) 강에 배를 대고 주교 신부를 뵈서온 이 복자를 엇지 우리 조선성교회의 장군이라 아니하며 용감타 아니하리오! 八十六년 후 오늘은 대구서 상해까지 四十八(48)시에 닷건마는 그때에는 二十(12)일이나 걸렷스니 세상이 변하기도 햇서니와 물질적 문명도 어지간이 발달되엇도다. 란간에 몸을 의지하고 량편을 돌아보며 우리 김 신부를 생각하니 감개무량이러라. 八(8)시에 상해 부두에 다다르니 우리를 마지러 온 뚜르니에 신부가 자동차로 인도함으로 그놈을 집어 타고 당가에 다다랏도다. 十二(12)시에는 전 일본 교황사절 자르듸니 각하께서도 환국하시는 길에 당가에 드섯기로 오찬을 가티 한 후 쉴 사이도 업시 나는 곳 병원으로 실려갓다.

 

大邱神學校師 李弼景(대구신학교사 이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