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신학

先烈(선열)과 文書運動(문서 운동) 山文頁(산문혈)

남재성
입력일 2026-02-05 09:54:19 수정일 2026-02-05 09:54:19 발행일 1951-09-01 제 95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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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상

秋凉이 入郊하니 燈火를 親近할 季節이다 殉敎先烈들의 높은 德을 追慕하는 때를 맞어 우리는 그 어른들이 어떻게 文書를 通하여 入信의 動機를 얻었으며 入信 後 信仰生活을 合理的으로 調和시켰으며 文書傳道로써 未信同胞들을 어떻게 導하였는지 이에 대한 몇 가지를 歷史에서 추려 보기로 하자

高麗磁器와 鐵甲船을 맹글어 낸 우리 先祖들의 獨創的 活動은 萬古의 眞理 가톨릭을 發見 維持하는데에도 充分히 發輝되었었다 天主敎가 韓半島에 信仰的 共同體로서 자리를 잡기 전에 朝鮮 學者들은 學問으로서 「天主學」「西學」을 論하였으니 當時의 巨儒들 芝峰 李쇄光 星湖 李익 順암 安鼎福 燕岩 朴趾源 等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들은 마치 希랍의 哲人들이 神에 對한 認識은 가졌으되 神을 섬기고 사랑하는 宗敎에는 이르지 못하였음 같이 單純히 天主「學」에 關한 論評에 그칠 뿐이요 天主敎 信者들이 아니었다 그중에 許균만은 그렇지 아니하였으니 그는 當時 朝鮮의 第一名門이었든 許草堂의 三男으로 태어나 女流詩人 蘭雪軒을 그 누이로 둔 자랑도 자랑이려니와 스스로 文學才藻가 非凡하여 詩 小說 戱曲 評論 等에 造詣가 깊었음은 勿論 朝鮮 最初의 小說 「洪吉童傳」을 지어낸 것으로 이름이 높다 그의 文名이 어찌나 높든지 明나라 尙書 錢牧齋로 하여곰 「許균… 以文鳴東海」란 讚辭를 發하게 했거니와 그보다도 높이 評價하여야 될 것은 그가 天主敎 信者였다는 점이다

於于野談에는 「許筠이 中國에 이르러게 十二章(오늘의十二端)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하고 李植澤堂集은 이르되「許균이 비로소 天主敎書를 얻어 學習하고…」라하였으니 우리의 偉大한 文章 筠은 그 入信의 動機를「天主敎之書」에서 비롯하였음은 確實하다

그 뒤 星湖 先生의 門下이던 洪有漢 亦是 天主敎 書籍을 硏究한 나머지 純全이 獨自의 힘으로 眞理를 깨우처 俗世를 멀리하고 小白山에 드러가서 十三年 동안 信道生活을 하다가 훌륭한 信者로서의 一生을 마쳤다

一七八三年 赴京使를따라 北京에 갔던 李承薰이가 그끗「드그라몽」神父에게서 自發的으로 領洗를 받고 이듬해인 一七八四年에 많은 天主敎 書籍을 가지고 還國하여 韓國 天主敎會史의 첫페-지를 꾸몄음은 너무나 有名한 事實이다 이에 앞서 正祖 元年(一七七七年) 겨울에 少壯學者 權哲身(李朝建國 時代의 名儒 權近의 子孫)은 그의 同學 丁茶山 丁若전(玆山魚譜의 著者) 등과 더부러 山寺에 들어가 人生問題의 解決을 얻고자 古賢들의 經書를 두루 읽었으나 精神은 도로혀 迷宮에 헤매일 뿐이다가 마침내 天主敎 冊에서 眞理를 發見하여 實踐하였던 것이다 李承薰이 北京에 가게 된 것도 이들의 同硏 李德祚(壬辰倭亂時 功臣이던 李德馨의 孫)의 勸告로 因한 것이었고 承薰이 歸國한 뒤 이들은 領洗를 받고 널리 傳道를 하였으니 韓國天主敎의 基礎 工事는 實로 書籍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湖南의첫 殉敎者 珍山 進士 尹持忠 이 入信한 動機도 또한 책을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는 天主實義(마테오 릿치 著)와 七克이란 冊을 빌어다가 謄書해두고 「獨自硏究學習」하여 天主敎理를 体得한 후 그 內外從인 權尙然에게 傳하여 가치믿고 가치 순敎하기에 이르렀으니 湖南땅을 처음으로 鮮血로 물드린 이 勇士들에 있어 天主敎 書籍은 死生을 超越하는 方法을 가르친 兵書였다 이와 같이 韓國天主敎의 始初는 書籍으로 열리고 書籍으로 번졌으니 儒敎를 正學으로 받들던 當時 朝廷이 天主敎를 처음에 天主學이라 부르다가 「命改稱邪學」(國朝寶鑑)이라 「西學」(文獻備考)이라 일컫고 그 書冊을 邪書 요書라 하여 正宗大王 은 「禁購書 焚敎書」의 秦始皇的 惡政을 되풀이 하였다 이리하여 그때 순敎先烈들이 所謂 邪學罪人으로서 極刑의 處斷을 받을 적에 或은 「借邪學之「書 「欽崇邪書」 「得…書册而來하야 廣布傳染」하는 罪目으로 或은 「邪學書冊을 都聚其家하고」 「고惑邪學之書」「學習요書」하였다는 罪名을 둘러쓰고 죽었든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先烈들은 天主敎書를 掌中寶玉으로 간직하여 이로써 信仰을 合理化하고 信心生活을 深化할 뿐더러 재조 있는 이는 책을 지어내고 글씨 잘 쓰는 이는 책을 벗기고 나아가서는 周文模 神父의 「護敎書」 丁保錄의 「上宰相書」와 같이 堂堂한 護敎書까지 있게 된 것이었다 天主敎의 入國乃至 迫害 當時에 있어 韓國 初代敎會의 組織的이고도 勇敢無雙하며 持續的인 文書活動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거니와 끝으로 己亥年(一八三九年)敎難에 殉死하신 福者 崔방지거의 逸話를 적어 볼가한다 福者 崔방지거 京煥은 韓國 初有의 神父 金大建과 함께 저명한 崔도마 神父의 아버지로 서울서 會長으로 계시다가 집에 돌아와서 捕卒이 오기를 기두리고 있었다 그동안 聖物과 聖牌를 소중히 감추어 두었으나 敎會書籍만은 그대로 두고 읽을 때에 그의 조카되는 崔요안이 깜짝 놀라 경계하는 말이 이게 어느 판국이라고 이 책들을 이냥 두시느냐고 하였다 방지거는 泰然히 對答하였다 「너나 安全한 곳을 찾을 도리를 하고 딴일 일랑 염려하지 마라 내가 성물을 감춘 뜻은 그자들에게 冒瀆을 당할까 싶어서 그런게지 이런 책들이야 어디 祝聖한게냐? 그리고 난리 때일수록 호반은 兵書를 參考하는 법이라면 우리네 책을 공부하는 건 이때를 두고 언제이겠느냐?」고

果然 이런지 얼마 못되어 京捕들이 수리산으로 내려와서 순敎者답게 죽는 법을 책에서 배우고 있었던 그를 잡으려 하였다 마치 强盜나 잡으러 온 듯이 문짝을 때려 부시고 큰소리로 욕질을 하면서 드러오는 그들을 向하여 방지거는 시치미를 떼고 조용히 물었다 「어디서 오시는 손님들이냐」고 京捕들이 퉁명스럽게 「홍 보려면 몰라 서울서 너를 잡으러 오는 거야」라고 호령을 할 때 福者는 반가운 손이나 맞는 듯이 「네 어찌 이리도 늦게 당도하였읍니까? 진작부터 손님들을 고대한 지가 퍽 오래입니다 갈테니 염려마시고 날이 샐라면 아직 멀었으니 자아 요기나 좀 하시고 푸욱 쉬시오 내일 아침에 우리 다 함께 가십시다」라고 대답하면서 융숭한 대접을 하였다 포졸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 처다보며 「얘 진짜 천주학쟁이는 여기 다 모였구나 도망갈까 염려될 건 조곰도 없으니 다 마음 놓고 자자꾸나」하고는 코를 곯아신다 이리하여 崔방지거는 殉敎한 뒤 福者位에 오르신 것이다

以上 가장 斷片的으로 옛 先烈의 文化活動은 모든 百年 훨씬 전 이야기들이다 그 後 時代는 바뀌어 信敎自由가 容認되고 傳道를 爲한 活動領域이 늘고 文化的 利器도 두드러지게 發達되었다 그러나 韓國가톨릭이 先烈의 본을 떠서 文化的으로 活動한 것이 무엇인가? 勿論 가톨릭經영의 小學校도 좋다 中學校도 좋다 大學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훌륭한 文化事業임에 틀림없다 孤兒院 養老院 病院도 다 좋다 그러나 더욱 時急한 것은 文書運動이다 經濟的이면서 實效的인 것이 文書傳道인 것이다 殉敎先烈들에게는 學校나 病院이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없지 못 할 것은 가톨릭書籍이었다 로마 三百年代 迫害 時에도 第一 먼저 있던 것이 著書였고 그것은 오늘날 古代 어느 敎會建物보다도 값진 것이다 共産 侵略이 文化의 연장을 빌어 敎會를 破壞하려 드는 이때 우리는 칼날 아래에서 英雄的 文化活動을 하신 先烈들을 꿈엔들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