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비오 11세의 미공개된 교황회칙

입력일 2020-06-10 16:28:01 수정일 2020-06-10 16:28:01 발행일 1973-01-01 제 847호 2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교회사에 큰 변화 일어났을지도

유대인 말살정책은 막았을지도
비오 12세는 부분적으로만 취급
나치즘과 반유대주의 등단죄
교황 삐오 11세의 서거 약 한달을 앞두고 완성된 비공개의 교황회칙이 만일 그 당시 공포되었더라면 2차대전 전(前) 교회사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리라는 추측이 역사가들과 예수회 신학자들의 공동된 의견으로 등장하고 있다.

「인류의 일치(후마니 제네리스 우니따스)」로 불려지는 등 회칙은 교황 삐오 11세의 특별한 요청을 받고 예수회의 죤 라파지 신부가 기초한것으로 당시 만연한 나찌즘과 파시즘 및 인종 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 등을 단죄하는 내용이 골자로 돼있다. 이같은 사실은 예수회의 월터 압봇 신부에 의해 처음으로 밝혀졌는데 그는 라파지 신부 사후 유명했던 그의 일대기를 엮기위해 라파지 신부의 문서와 일기장을 정리하던중 발견했다고 한다. 압봇 신부에 의하면 교황 삐오 11세는 1938년 6월 당시 예수회 주간지「아메리카」의 편집인이며 인종간의 정의문제분야 전문가인 라파지 신부에게 동회칙 초안을 비밀리에 요청했다고 전한다. 교황의 요청을 받은 라파지 신부는 독일 출신 예수회원 구스타브 군들하 신부와 프랑스 예수회원 구스타브 데스부콰 신부와 공동작업으로 4개월후 초안 작성을 완료했으나 바로 교황에게 보내지 않고 예수회 총장 불로디머 레도코비키 신부에게 보냄으로써 동회칙의 공포 여부를 판가름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교황회칙의 초안을 받은 총장신부는 동초안이『시기에 적당치 않는것』으로 판단, 이를 다시 이태리 예수회원 엔리코 롯씨 신부에게 보내 수정을 의뢰했다. 롯씨 신부는 그 당시 병으로 앓고있어 이를 검토하지 못한채 1939년 1월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이때 교황은 총장신부에게 동초안을 더 이상 지연시키지 말고 빨리 보내줄 것을 독촉했다. 그리하여 교황이 동초안을 받은때는 서거하기 20여일 전인 1939년 1월21일로 이때는 이미 교황이 중태에 놓여있었다. 이에대해 압봇 신부는 교황이 중병으로 앓아눕기전 이 초안을 읽어볼 시간을 가졌었는지 아니면 그의 책상위에 그대로 있었는지는 알수 없다고 한다. 교황 삐오 11세의 서거후 수년동안 교황의 서거를 둘러싸고 주변에서는 교황이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정치철학과 그들의 행위를 고발하려다 무솔리니가 보낸 이태리 첩자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풍문이 그치지 않았다.

그후 교황 삐요1 2세가 즉위한 후 그는 전임자의 미공개된 회칙을 분부적으로는 언급했으나 그 역시 이를 공포하지는 않았다. 교황 삐오 12세는 1939년 10월20일 교황으로써 처음 발표한 회칙「숨미 뽄띠피까뚜스」와 같은해 크리스마스 메시지에서 전체주의 제도를 경고했었는데 그 내용은「라파지 교서」에서 취한 것이 확실하다고 압봇 신부는 말한다. 한편「독일 가톨릭과 히틀러의 전쟁」의 저자이며 가톨릭 사회학자인 고돈쟌 박사는 만일 교황회칙이 1938년에 발표되었더라면 이는 중요한 장기적 효과를 가져왔으리라고 술회한다. 그는 이 회칙으로 인해 나찌의 반유대적 행위는 중지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찌주의자들은 아마도 유대인 말살단계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회칙이 발표되었다면 각국의 가톨릭 신자들이 이에 곧 협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압봇 신부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정치철학을 단죄하고 또한 반유대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맹령히 공격한 동회칙이 발표되었더라면 이는 히틀러로 하여금 독일의 모든 주교들을 포로수용소로 보내기에 충분했다고 말하는 역사가들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한다.

이어 그는 그 결과 독일의 위기로 말미암아 파첼리 추기경은 교황 삐오 12세로 선출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1963년 11월24일 83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라파지 신부는 예수회 주간지「아메리카」에서 활약한 한편 인종간의 정의문제 전문가로 여러 저술을 남기기도 했으며 또한「뉴욕」시에 위치하고 있는 가톨릭 국제협의회 창설자이기도 하다. (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