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박성순(아우구스띠노·64)씨를 「이상한」사람이라고 부른다. 나병경력도 없는 그가 나환자 정착촌에서 음성나환자들과 섞여 스스럼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조금은 기이하게 비쳐지기 때문이다.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신평3리「포천농축단지」, 소위 음성나환자 정착촌이라 불리는 그곳에서13년째 살아가고 있는 박씨는 그에게 붙여지는「나환자들의 손발」등등의 칭호는 전혀 달가와 하지 않지만 오직「동반자」라는 단어 하나만은 기꺼워한다.『왜 거기서 사느냐고 묻지말고, 십수년을 함께 살아온 나를 보며 그들을 이해하도록 도와달라』는 말이 그의 뜻을 충분히 짐작케하고도 남는다.
박씨가 포천 농축단지에 들어온 것은 73년. 음성나환자들이 갖은 고생 끝에 정착촌을 이룬지 불과 4개월 만이였다
함경북도에서 월남, 20여 년간 서울에서 시내버스를 운전하다 굳이 생활의 터전을 나환자촌으로 옮긴 것은 박씨로서도 일종의 모험이였다.
딸을 음성나환자에게 시집보낼 정도로 나병에 관해 이해가 깊었던 박씨였지만 막상 꺼림직한 감정, 그리고 가족들의 반대를 극복하는데는 어려운 결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평소 시집간 딸의 집을 찾아갈 때마다 뭔지 모르게 안타까움을 많이 느껴왔던 박씨는, 누군가 이들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씻어주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 오랜 시일 끝에 부인을 설득시켜 마을로 들어설 수 있었다.
20여년간 무사고 운전이었지만 재산을 다 털어 집한채, 돼지 20마리를 사고 나니 한푼도 수중에 남아 있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던 손이 나무하고 가축키우는데 제대로 익숙할 수 없었지만『어디서든 부지런한 사람이 밥을 먹는다』는 신조로 열심히 일을 해 가축을 늘려갔다.
그런던 중 운전경력을 살려 마을주민들을 위해 사료를 구입하러 갔다가 적재함에 부딪혀 갈비뼈가 2개 부러지는 중상을 입기도 하고, 계란판로가 막혀 며칠간 계란을 싣고 전국을 다니기도 했다.
74년에 영세 입교한 지각신자였지만 마을내 천주교와 장로교의 교파싸움에 적극 뛰어들어 마을공동체의 오해를 막기도 했으며 가톨릭나사업협회를 자주 방문, 마을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등 마을에 들어오고부터 박씨가 일거리를 놓는 날이 없었다.
이제는 닭 3천수를 가져 일단 먹고 입는 걱정은 덜었고 2남 2녀에 손자 2명까지 함께 살 수 있어 다복한 생활을 누리게 됐으며 85년부터 신평공소(포천본당 관할) 회장을 맡아「신앙을 통한 공동체단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그동안 주민들도『정상인도 우리와 함께 생활 할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며 생의 의욕을 불태워 갔으며 더욱 굳센 믿음을 갖고자 노력해 왔다.
그러나 박씨는 풀리지 못한 매듭 때문에 결코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그것은 마을주민들이 가구당 4백만원 이상의 빚을 지고 있고 점점 생활형편이 어려워져 가고 있다는 것. 지난 겨울, 부인이 암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축사마저 무너져 버린 한 주민의 파산선고는 그의 마음을 더 어둡게 했다
또 생활의 어려움으로 자꾸 형식적으로만 돼가는 주민들의 신앙생활을 개선하기위해 수녀들을 모시고 싶지만 그것도 형편이 어려워 주저하고 있는 실정,
『나병에 걸렸다고 음성나환자라면, 감기에 걸렸다고 해도 음성감기환자가 아닙니까』라고 항변하는 박씨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나환자들에 대한 인식개선, 주민들 자립, 신앙생활 쇄신을 위해 오늘도 「자신」이 아닌「남」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