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167년간 한국 천주교회는 서울대교구를 중심으로 민족사에 깊숙이 자리해 왔다. 박해시대와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민족화 운동 등 조선 후기부터 근ㆍ현대 200여년을 거치면서 서울대교구 역대 교구장들은 항상 그 역사의 현장에 서 있어 왔다.
특히 오늘의 서울대교구로 만개(滿開) 시킨 김수환 추기경이 현직에서 은퇴함으로써 새옷을 입게 된 서울대교구는 제3천년기 새로운 시대적 비전을 제시해줄 신임 교구장 정진석 대주교에 「새로운 복음화」의 텃밭을 일궈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역사의 한 장을 접고, 새롭게 쓰여질 미래의 추억을 고대하며 서울대교구 역대 교구장들의 면면을 간략하게 조망해 보았다.
서울대교구 역대 교구장들을 시대적으로 구분하면 크게 3가지 즉 「박해시대 교구장들」과 「종교 자유와 일제 강점기 시대 교구장들」 「한국인 교구장 시대」로 나눌 수 있다.
박해시대 교구장들은 1831년 9월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교회를 북경교구로부터 분리하여 독립된 대목구로 설립되는 동시에 초대 감목으로 임명된 소 브뤼기에르 주교부터 제6대 리델 주교 시대까지로 구분할 수 있다.
「종교 자유와 일제 강점기 시대 교구장들」은 제7대 백블랑 주교-제9대 원 라리보 주교까지이고, 「한국인 주교 시대」는 제10대 노기남 대주교로부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박해시대 서울교구장들
조선교회 재건에 큰몫…순교로 모범
한국인 사제 양성ㆍ출판사업
성모 및 순교신심운동 전개
박해시대 서울교구장들은 조선교회 재건이 가장 큰 일이었다. 교구장들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직접 순교로써 모범을 보였고, 한국인 사제 양성과 교회사 및 교회서적 출판사업, 성모 및 순교자 신심 운동을 전개했다.
초대 교구장 소 브뤼기에르(蘇 Bruguiere) 주교는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조선 입국을 기도했으나 중국 서만자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그러나 살아서 이루지 못한 그의 조선 선교 열의는 조선 전교 100주년을 맞아 파리외방전교회가 그의 유해를 서울 용산 성직자 묘지로 이장함에 따라 선종 94년만에 한국땅에 안장됐다.
조선교회는 1835년부터 제2대 범세형 앵베르(Imbert) 주교가 입국함으로써 비로소 주교와 신부, 평신도로 구성된 견고한 교계 기반을 갖출 수 있었다. 조선교회 창설 53년만에 한국 땅을 밟은 첫 주교인 앵베르 주교는 김대건 최양업 신부 등을 선발 한국인 사제 양성에 노력하다 순교했다.
제3대 페레올(Ferreol) 주교는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와 함께 조선교구 재건에 전력을 다했고, 메스트르 신부에게 「성영회」를 조직케 해 최초로 고아 구제사업을 전개토록 했다.
제4대 베르뇌(Berneux) 주교는 1855년 입국, 1866년 병인박해때까지 10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사목활동을 전개,배론신학교 건립과 서울에 2개의 인쇄소를 세우는 등 교회 재건의 뿌리를 다지다 병인박해로 순교했다.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1866년 3월 순교하기 까지 신부로서 12년, 주교로서 9년 총 21년간 조선 선교사로 활약,박해시대 가장 오랫동안 활동했고 조선의 언어와 풍습에도 가장 능통했던 제5대 다블뤼(Daveluy) 주교는 「성모무염시태」를 조선 교회 새 주보로 교황청으로부터 인준받고, 「성모성심회」를 창설했고, 「한국천주교회사」와 「조선 순교사」 「한한불자전」(漢韓佛字典)을 편찬했다.
병인박해때 요행히 살아남아 조선을 탈출해 프랑스 함대에 선교사 구원을 요청, 병인양요의 빌미를 제공한 리델(Ridel)신부가 제6대 교구장이 되어 1877년 다시 조선에 입국했으나 곧 체포되어 중국으로 추방됐다.
박해시대 교구장들중 순교자 3명은 성인품에 올라 있다.
종교자유와 일제 강점기 시대 교구장들
고아원ㆍ양로원 설립 등 사회사업 펼쳐
「신사참배」강요 등 교회 탄압에 항거
라리보주교, 「한국인 주교임명」교황께 간청
1882년 선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면서 제7대 블랑(Blanc) 주교는 종현 성당을 비롯하여 여러 성당의 건립을 위한 대지를 매수하는 등 교회 재건에 힘썼고,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 사회사업 활동을 펼쳤다.
이어 1890년 제8대ㆍ뮈텔(Mutel) 주교가 임명, 1898년 명동 대성당 축성식을 계기로 각 지역에 성당이 건립 전교사업이 전국 규모로 확대 발전해 나갔다. 1911년 조선대목구에는 서울대목구로 개칭되고 또 대구대목구가 분리됐고, 1920년 원산대목구, 1927년 평양지목구가 다시 분리됐다.
뮈텔 주교는 또 1925년 7월5일 교황청에서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 79위가 시복되는 영광의 현장을 지켰으나, 「정교분리」원칙을 지나치게 고수, 안중근을 파문하고, 신자들의 독립운동을 저지해 민족사에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1933년 제9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라리보(Larribeau) 주교는 일제 강점기하 민족문화 말살과 신사참배 강요 등 교회 탄압과 맞서 항거, 한국인 사제 양성과 「가톨릭 청년」창간 등 교세 확장과 문화활동에 전력을 기울이다 일제의 강압으로 사임했다. 그러나 라리보 주교는 조선 교회 보존을 위해 사임을 결심하고 한국인 성직자를 주교로 임명해줄 것을 교황청에 간청, 노기남 신부가 주교로 수품돼 후임 서울 교구장직을 맡게 했다. 그는 1962년 교계제도 설정과 함께 초대 대전교구장이 되어 58년간 한국에서 사목활동을 했고 1974년 8월12일 선종했다.
한국인 교구장 시대-노기남 대주교
조국 재건과 교회복구에 갖은 노력
「교계제도」설정에 큰 공헌
1942년 초 제10대 교구장으로 한국인 최초의 주교인 노기남 주교가 성성됨으로써 서울교구는 자립하게 됐다. 해방 이후 「경향신문」을 창간하고, 한국순교자현양회 창설, 새남터 순교 기념탑 건립 등 순교자 현양사업을 강력히 추진해 교회조직을 신속하게 정비했다. 6ㆍ25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군종신부단」을 창설한 노 주교는 휴전이후 세계 각국을 순방하며 원조를 청해 조국 재건과 교회 복구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세계로부터 한국천주교회의 자립능력과 성숙성을 인정받아 1962년 3월10일 교황청이 한국교회 「교계제도」를 설정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교계제도 설정으로 서울대목구는 대교구로 승격됐고 노 주교는 대주교로 승품됐다.
1967년 3월23일 노 대주교의 은퇴로 윤공희 주교가 제11대 교구장 서리로 1년간 봉직했다.
김수환 추기경 시대
한국천주교회 최초 추기경 시대 개막
고통받는 이들에 교회 개방…현실 동참
200주년 기념대회 등 역사적 사건 주도
1968년 4월 9일 제12대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한 김수환 대주교는 그해 10월6일 교황청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14위가 시복되는 영광을 누렸고, 다음 해인 1969년 3월 추기경으로 임명,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추기경 시대를 열었다.
사회교리 실천으로 한국천주교회를 대내외적으로 크게 격상시켜놓은 인물인 김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한 교회 쇄신 정신에 따라 사목행정을 펼쳤으며 가난하고 힘없고 고통받는 국민들에게 교회를 개방,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실천했다.
김 추기경은 재임기간 중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 거행,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개최,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 등 한국 천주교회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사건을 주도했다.
또한 한국민의 양심의 대변자로, 정의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모습을 지난 30년간을 한결같이 유지, 한국민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됐다.
김 추기경의 카리스마적인 사목 영도력으로 서울대교구의 교세는 급속도로 신장해 교구장 착좌 당시인 1968년 말 48개 본당 14만여명이던 교세가 1997년 12월말 현재 신자 1백21만6천5백여명, 신부 805명, 본당 197개로 성장시켰다.
제3천년기를 여는 정진석 대주교
영적ㆍ내적 성숙ㆍ충만도 다져 주길 기대
오는 6월29일 제13대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할 정진석 대주교는 2천년 대희년과 제3천년기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여는 교구장으로 기대되고 있다.
평소 「새로운 복음화 시대」개막을 위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에 따라 새로운 열의, 새로운 방법, 교회의 내적 쇄신을 주창해 왔던 정진석 대주교는 급속도로 성장해온 서울대교구에 영적, 내적인 성숙과 충만도를 다져줄 대주교로 기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