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1920년대 본당·공소 회장들의 필독서「회장직분」을 아십니까?

신정식 기자
입력일 1999-03-14 01:32:00 수정일 1999-03-14 01:32:00 발행일 1999-03-14 제 2142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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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지도자로서의 자질·덕목 제시
공소의 흥망성쇠 회장 역할에 달렸음을 강조
“믿음이 굳고 열심하고, 지혜로운 덕을 갖추고 순명하며, 모든 일에 거짓과 속임이 없이 성실하고, 지도자로서 책임을 다하려면 지식을 갖춰야 한다”
'회장직분'. 1923년 서울교구 최루수 신부가 저술했고 뮈텔 주교가 감수했다. 당시 본당이나 공소 회장들이 어떤 자질과 덕행을 지녀야 했으며 본당 신부 부재시 어떤 역할들을 수행해야 했는가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최근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가 신앙 선조들의 삶과 신앙을 연구하면서 '회장직분'을 강독용으로 선정하고 현대어로 옮기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한 자 한 자 필사하는 과정에서 기대 이상으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으며 마침내 순교자현양위원회는 평신도를 위한 지침서로 활용하고자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소공동체를 지향하는 오늘 한국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나아가 한국교회 구성원 모두에게 박해시대부터 내려오는 참된 평신도 상은 어떤 것이고, 적어도 평신도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과 신심이 요구되었는지를 돌이켜 보게 할 '회장직분'의 내용을 알아보고 당시 회장의 역할을 되새겨 보았다.

'회장직분'은 제1편 회장, 제2편 교우제도, 제3편 칠성사, 제4편 성당 성회(聖會) 성물, 제5편 전교 등 전체 5편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중심 내용이 담긴 제1편에는 회장의 역할, 직무, 본분, 교우 다스리는 법, 요구되는 덕행 등과 함께 여회장, 전교회장 등등 회장에 관한 모든 지침이 열거되고 있다. 제2편에서는 교우의 집안제도, 공소제도, 주일과 파공을 지키는 법, 대소죄 등에 관해 적고 있다.

제3편에서는 칠성사의 기본 교리와 함께 대세주는 법 등 회장이 알고 있어야 할 바를 가르치고 있다. 제4편에서는 성모성심회, 매괴회, 전교회, 성체회, 명도회 등 여러 신심단체의 정신과 활동 지침 그리고 성당과 성물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며 제5편에서는 공소예절의 준비, 신부나 주교 영접 등을 언급하고 있다.

"…시대가 변하여 자연히 할 사업이 많아져 신부 혼자 다하지 못할 일을 불가불 조력해야 할 지니 이 조력할 자가 곧 각 지방 각 공소 회장이로다"라고 회장의 직임을 밝히고 있는 이 책은 회장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잘 되는 공소는 흔히 그 공소회장이 착하기 때문이고, 반대로 공소가 수계범절에 소홀하고 냉담하거나 혹은 아주 망한 것은 그 공소회장이 소홀하고 냉담하거나 아주 악하기 때문이다"

즉 한 공소의 흥망성쇠가 회장의 역할에 달려있다는 이 문구는 당시 회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사실 한국교회사에 있어 공소회장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성직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이렇다할 교통편이 없던 시절이라 봄 가을 판공 때를 제외하고는 회장이 공소 일을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공소 예절은 물론 세례를 집전해야 했고 당시에는 혼인예식까지도 주례했어야 했다. 공소 살림도 살아야 하고 신자들도 돌봐야 했으며 교회 문서를 작성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등 평신도에게 허락된 일은 모두 회장의 몫이었다. 교회 일 뿐만이 아니었다. 신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교리를 익히게 했으며, 공소나 마을의 대소사에 어른으로서 관여하고 편견없는 조언과 가르침을 줬어야 했다. 그러면 이같이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던 회장은 어떤 신자들이 해야 했을까? 회장직분은 공소회장들에게 요구됐던 덕행들을 여섯 가지로 나눴다.

첫번째는 신덕이니 믿음이 굳어야만 회장으로서 봉사할 수 있다는 얘기다. 두번째는 열심함을 들고 있다. 자신이나 집안 사람뿐 아니라 공소신자나 냉담자 나아가 외교인까지 돌보려면 열심히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세번째는 지덕이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항상 하느님께 지혜로운 덕을 간구해 풀어나갈 것을 당부한다. 네번째는 순명을 꼽고 있다. 신부에게 순명해야만 신자들이 순명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다섯번째로 성실함을 들고 있다. 모든 일에 거짓이나 속임이 없어야 된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지식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지도자로서 책임을 다하려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바 참뜻을 알아야 하니 이 '회장직분'을 비롯해 많은 책을 읽고 공부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렇듯 회장에게 요구되는 덕목과 역할이 분명했음을 볼 수 있고 또한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당시 회장들은 이 책을 외우다시피 하며 노력했음을 기록이나 구전을 통해 알 수 있다. 신부가 무조건 회장을 임명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준을 요구했고 그 기준에 맞춰 누구나 수긍하고 따를 수 있는 신자를 회장으로 임명했다는 사실도 엿볼 수 있다.

소공동체와 복음화를 지향하는 한국교회는 평신도 한사람 한사람이 과거 공소회장의 역할 즉 평신도 지도자가 돼야함을 요청하고 있다. 이렇듯 평신도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이렇다할 지침서 하나 찾아보기 힘든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좥회장직분좦은 남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조만간 현대어로 옮겨져 쉽게 접할 수 있는 '회장직분'을 통해 비록 시대환경은 다를지라도 오늘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이 잊고 있는 평신도 상을 되돌아 보고, 시대를 앞선 선조들의 '평신도 사도직' 수행이라는 모범을 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신정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