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교회건축사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단국대 김정신 교수(공대ㆍ건축사전공)가「교회 건축가 알빈 신부와 그 작품연구」라는 제하의 관계논문을 발표, 관심을 끌고있다. 이 논문은 한국 교회건축사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나 건축계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독일인 알빈 신부의 신학사상과 교회건축개념을 연결시켜 고찰, 묻혀져있던 한국 교회건축사의 일면을 밝혀주고 있다. 다음은 김정신 교수의 논문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알빈(Alwin Schmid)은 성 베네딕또회 수사신부로서 「베를린」「빈」「뮌헨」등의 미술대학에서 가톨릭 미술과 건축을 연구하고 한국에서는 1961년부터 1978년까지 1978년까지 17년간 교회건축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가 설계한 70여개의 성당과 40여개의 병원, 학교 등은 양과 질적인면에서 한국 교회 건축사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첫작품인 김천 평화동성당(58년)은 교회건축의 새로운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한국교회 건축사의 신기원으로 평가된다. 왜관수도원에 주로 머물렀던 관계로 충청도와 경상도에 집
중돼있는 그의 건물은 거의가 콘크리트와 시멘트 벽돌조의 소박한 구조로 일체의 장식을 배제하고 구도와 재료를 솔직히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건축형태에 있어 알빈 신부는 가능한한 장방형을 피하고 신자들의 공간을 제단부근으로 넓게 돌려놓았다. 장방형ㆍ십자형, 부채꼴, 다각평면형 등 네가지 형태로 중앙집중형 평면을 새롭게 구성했다. 알빈 신부는 주변을 압도하는 교회상을 지양하고, 주변도시, 자연환경과의 조화로움을 꾀했다. 그가 설계한 성당은 눈에 잘띄지 않고 강요치 않는 모습으로 외부인에게 장벽을 만들지 않고 친근감을 안겨준다. 이는 교회가 하느님과 그 백성의 집일 뿐아니라 지역서회 활동의 중심지로 개방돼야 한다는 알빈 신부자신의 신학적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적 상황에 맞는 교회건축연구에도 관심을 가진 알빈신부는 건실한 창과 문을 가진 서양식 건물의 장점을 한국의 지봉형태와 접목시켜 교회건축의 토착화를 시도해 보기도 했다. (베네딕또회 서울분원,인천화수동성당). 그는 직설적인 전통 표현보다는 규모나 내부공간 분절을 통해 단순, 검소한 디자인으로 한국적 이미지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알빈 신부의 교회건축은 신학의 새흐름을 연구하고 그것을 적용해 제2차「바티깐」공의회가 추구하는 교회의 사회적인면ㆍ포용적인 면에 관심을 가졌다.그는 신학적 원칙「이것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고 한 성경말씀에서 출발하고 있다. 알빈 신부는「모든 신자가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교회내부 공간구성의 근본으로 삼았다. 따라서 교회는 미사예식에 적합토록 설계돼야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살아있는 공동체에 의미를 획득한다고 보았다. 알빈 신부는 말씀의 전례때 강론을 하는 장소는 음향이 좋도록 구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원칙은 세부적 공간에도 적용, 신자들이 제단과 가까이 있을수 있도록 그의 교회는 제단이 회중석내로 내려오고 성찬란이 제거되며 회중석을 제단주위에 부채꼴로 배치하고 있다. 또한 성체 현현과 미사밖에서의 성체조배를 구분, 감실과 제단분리를 주장해 성체조배할때, 미사와는 다른 공간체험을 갖도록 배려했다. 세례성사와 고백성사의 공적인 면을 고려, 그 장소를 은밀한 곳이 아니라 눈에 띄는 공개적 장소로 배정한 것도 그의 교회가 기도, 묵상의 장소로서 따뜻한 공간이 되도록 벽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알빈 신부의 교회건축물에서는 이러한 신학적 원칙외에도 교회건축의 사화학적인 원칙들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장소ㆍ위치에 따라 「심볼로서의 교회」「회중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세상과의 접촉처로서의 교회」를 각각 강조했다. 그는 가능한 한 교회를 다양한 활동을 위한 공간을 가진 친교의 중심으로 계획, 사제관ㆍ당의실ㆍ회합실 유치원을 하나로 통합했다. 알빈 신부의 교회는 주공간과 부공간을 가변적으로 구성, 다양한 체험을 유도한다. 또한 그는 교회가 신자뿐 아니라 세상과 접촉하는 공간이 돼야한다고 생각, 일반인을 위한 예식장 독서실 또는 성인교육장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알빈 신부는 근본적, 신학적, 사회학적 그리고 사제적인 심사숙고를 거친 후에 모든 건물을 계획했다. 세상으로 확 열린 교회, 그리고 일방적인 신성화를 거부하는 속에서 그는 「완전한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기여하는」새로운 교회건축상을 한국에 도입한 것이었다. 알빈 신부의 주요 교회건축물로는 독일에서 설계한 김천 평화동성당(58년)을 비롯, 점촌성당(59년) 서울 마리스타 수도원내 성당(65년)서울 심양동(現미아3동)성당 (68년)등 70여개 성당과 왜관 순심중학교(62년)부산 오륜동 피정의 집(68년) 등 일반건축물들이 있다. 독일남부 쉬바엔지방의 스파이킹겐에서 1904년 5월 29일 출생한 알빈 신부는 1936년 5월 1일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이듬해인 1937년 내한, 만주 북간도의 연길교구에서 선교사로 활약하다가 1946년 5월 20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후 1949년 본국으로 추방됐다. 1961년 12월 15일 다시 내한한 알빈신부는 1978년 11월 17일 왜관수도원에서 74세를 일기로 선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