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1. 물을 건너거나 또는 한편의 높은 곳에서 다른 편의 높은 곳으로 건너다닐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 2. 두 사물이나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 3. 중간에 거쳐야 할 단계나 과정. 이 다리가 젊음의 거리 홍대 입구에 놓여진지 약 1년2개월이 지났다. 가톨릭청년회관이 ‘다리’라는 애칭을 갖고, ‘다리’ 프로그램을 운영한지는 4개월이 됐다. 그동안 젊음이 오가는 ‘다리’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최근 연극 ‘없는 사람들’을 선보이며 ‘다리’ 정신을 실현하고 있는 가톨릭청년회관을 찾아가 봤다.
# 없는 사람들
포스터.
청년 문화 활성화와 복음화를 목적으로 (재)서울가톨릭청소년회가 운영하고 있는 가톨릭청년회관 ‘다리’(이하 다리)는 공연을 기반으로 한 청년 복합문화공간이지만, 청년들의 신앙 배움터라는 정체성만큼은 흔들림이 없다. 지난 3월 25일 다리의 첫 프로그램이자 오프닝 파티인 ‘다리의 봄’을 선보인지 4개월, 다리에 여름이 찾아왔다. 지난봄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통해 청년을 만나온 다리가, 잎이 무성해지는 여름을 맞아 정기공연 첫 번째 시리즈를 마련했다. 연극 제목은 ‘없는 사람들’. 연출은 가톨릭청년회관 관장 유환민 신부(서울대교구 청소년국 차장)가 맡았다. 다리가 첫 번째로 선보이는 연극 ‘없는 사람들’은 다리가 위치해 있는 서울 동교동 인근 ‘작은 용산’이라 불리는 두리반 식당의 강제 철거와 이에 대해 531일간 저항해온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따온 철거촌 이야기다. ‘철거촌’이라고 하면 과거 1960~70년대 이야기일 뿐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철거촌’은 지나간 역사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재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오늘의 이야기다. 다리가 위치해 있는 홍대 거리에서 몇 개의 거대한 빌딩을 지나 8차로 도로를 건너기만 하면, 11세대의 세입자들의 보금자리였던 두리반 철거촌을 마주칠 수 있다. 힘 없고 백 없고 돈 없는 이들은 우리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분명히 ‘있는(존재하는)’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없는 사람들’이다.
다리의 초연작인 ‘없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잊혀진 존재들의 이야기, 잊혀진 상처와 잊혀진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 없는 사람들의 질문
연출을 맡은 가톨릭청년회관 관장 유환민 신부는 연극 ‘없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잊혀진 존재들의 이야기, 잊혀진 상처와 잊혀진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고 밝혔다.
연극은 철거를 앞둔 서울의 한 동네를 배경으로 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김밥집을 하며 근근이 생활을 유지해나가던 연희네와 김밥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영식이네, 김밥집 2층에 세들어 사는 마을버스 운전기사 준형과 철거촌 마을 성당의 주임신부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이 ‘없는 사람들’은 2시간 20여 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의 심장을 겨냥해 질문을 던진다.
“이 집에 7000만원이 들어갔는데 2000만원만 받고 나가라고요? 여러분이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TV에서 아프리카 기린 이야기를 봤어요. 초원이 사막화되면서 기린들이 살기가 어려워지자, 수천 만원 하는 장비를 들여 기린을 초원으로 이주시키는 이야기를 보면서 감동 받다가 문득 화가 났어요. 그럼 우린 뭔가요?”
“용역들이 들이닥쳐 순식간에 제가 살던 집을 허물었어요. 제가 그 안에 있었는데도 없는 사람인 듯.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어요…. 이런 게 사는 건가요? 제대로 사는 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런 거에 대한 느낌 자체가 없어요. 원래 혼자였지만 이젠 정말 혼자란 생각이 들어요.”
“재개발이 오히려 손해가 된다는 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이런 고통은 없었을텐데…. 우린 왜 모든 게 지나간 다음에 알게 될까요?”
없는 사람들은 집을 잃고, 집에 얽힌 추억을 잃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삶에 대한 희망도 잃은 얼굴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지금 당신은 무얼 하고 있습니까” 하고.
# 다리를 건너 오세요
연극 ‘없는 사람들’은 철거촌 주민 이야기를 닮은 사회극을 넘어선다. 종교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강한 복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직접적이면서도 전혀 직접적이란 느낌이 들지 않게, 복음적 가치를 부드럽게 연극 속에 담아냈다. 극중 사제는 십자가 앞에 앉아 “주여, 저는 너무 많은 것을 봤습니다. 죽은 고양이의 시체, 불안과 공포에 떠는 사람들, 머리에 피를 흘리는 사람, 모욕당하고 분노한 얼굴…왜 저에게 이런 것을 보여주십니까? 정말 이렇게밖에 될 수 없었던 것입니까? 주여, 정말 어렵습니다”라고 절규한다. 그리고 이내 주님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한다.
“아들아, 내가 바로 너다. 나는 네가 있어야 한다. 내가 계속 축복하려면 너의 손이, 말하려면 너의 입술이, 고통 받으려면 너의 몸이, 사랑하려면 너의 마음이, 구원하려면 너 자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아들아, 나와 함께 있어다오.”
세상의 고통과 상처 한가운데를 지나며 만신창이가 된 우리들에게 “나는 바로 너다”라고 말하는 주님의 음성이 무대 한 가운데서 울려퍼지는데도,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탄탄한 구성과 스토리 속에 복음정신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녹아있기 때문이다. 연극의 시작도 십자가의 등장과 미사 봉헌 장면으로 시작되고, 장례식 풍경 등 곳곳에 종교색이 녹아있는데도 ‘가톨릭’이라는 경계선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날 연극을 관람한 장미린(29?비신자)씨는 “가톨릭 신자인 친구의 초대로 연극을 관람하게 됐는데 가톨릭적이라는 거부감이 전혀 들지 않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비신자 청년들도 ‘가톨릭’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다리’ 역할을 하겠다는 가톨릭청년회관의 목적이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연극은 십자가의 입장으로 시작해, 하늘나라로 간 연희가 십자가와 함께 객석에서 무대로 올라오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처음과 끝, 그리고 극 중간 중간에 십자가는 무대 한 곳에 언제나 말없이 서 있다. 십자가는 무대 중심에서, 또 때로 무대 한쪽에서, ‘없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없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배웅한다. 객석에서 하늘나라로 간 연희와 함께 걸어 나오는 장면에선 ‘예수님께선 언제나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종교는 세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 있다. ‘세상의 빛이 되라’하신 복음 말씀처럼, 또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고 하신 말씀처럼, 다리의 초연작 ‘없는 사람들’은 세상 이야기를 십자가의 품 안에서 조용히 풀어낸다.
‘없는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희망’에 대해서 얘기했다. 강제철거에 저항하며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는 연희의 아빠는 딸의 무덤을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저는 제가 잘하고 있다고, 제가 하는 일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제일 뼈아픈 것은 연희에게 ‘희망’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요. 그때도 이렇게 아름다웠을 텐데요.”
‘없는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희망’, ‘없는 사람들’이 보고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엿보고 싶다면 서울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 ‘다리’를 찾아가면 된다. 공연은 7월 31일까지, 평일 저녁 8시, 토요일 오후 3?6시, 일요일 오후 3시에 가톨릭청년회관 CY씨어터에서 펼쳐진다.
※문의 070-8668-5795 가톨릭청년회관 ‘다리’, www.scyc.or.kr, twitter @cyc_d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