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도중에 겪었던 일이다. 고등학교 하교 시간 때라 버스 안에는 학생들로 북적였다. 그때 내 앞에 서 있던 세 명의 여고생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난 나중에 코 할래, 너도 코 해야겠다.” “난 코랑 쌍꺼풀 할거야.” 아직 중학생의 티가 남아있는 고등학교 1학년쯤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성형수술에 대해 거리낌 없이 얘기한다는 것에 놀라웠다. 그 말투에서 성형수술에 대한 거부감이나 무서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학생들을 지켜보면서 이처럼 외적으로 고민하는 것만큼 내적인 고민도 함께하고 있는지 걱정스러웠다.
아름다워지고 싶고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다. 자신의 외모를 꾸미고 가꾸는 것에 대해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늘날 매우 심각해진 이러한 풍조는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외모를 중시하는 탓에 너도나도 성형을 하기 위해 병원으로 몰려들고, 덕분에 성형외과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러한 문화는 이른바 ‘성형중독’ ‘성형미인’이란 신조어까지 탄생시켰다.
외모 지상주의 열풍의 원인에는 매스미디어의 영향이 크다. 드라마나 화장품 광고, 패션 잡지 등에 나오는 남녀를 보면 늘씬한 몸매에 잘 생긴 얼굴의 연예인들로 도배를 하고 있다.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이나 동화책에 나오는 주인공도 예쁜 공주이거나 꽃미남 왕자들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이처럼 외모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의 여러 영역에 침투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서울의대 연구팀이 여대생 1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절반이 성형수술을 했으며, 앞으로 하고 싶다는 여대생이 82%, 심지어 성형수술을 받은 응답자 중 95% 이상이 또 다른 성형수술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레바논의 소설가 칼릴 지브란은 아름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귀에 들리는 것도 아니다. 아름다움은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이며 귀를 막아도 들리는 영혼의 것이다. 아름다움의 극치는 생명이 그 거룩한 모습을 그대로 내보일 때이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을 그대로 내보이는 것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실현하는 것과 같다.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물질적 포장에 불과하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바로 생명의 신비이며 생명 그 자체이다. 우리는 살아 숨 쉬는 생명을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경이로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아름답다. 잠재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외모란 것도 다분히 상대적이다. 내 곁에 있는 친구가 나를 보았을 때 아름답다고 생각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앙인의 관점에서 보편적인 아름다움은 사랑과 희생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면 곧 마음을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이웃과 나누며 더불어 사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일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얼굴보다 마음이 고와야 한다’는 것이 해당한다. 이 말은 윤리적으로 선한 생각을 갖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의미다.
외면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대적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하지만, 내면적인 아름다움은 영원불변이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정성을 다해 봉사하는 사람들, 자신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꺼이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힘들고 고달픈 삶이지만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기쁜 맘으로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는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진정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