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복음생각] 십자가의 길을 따라 나서며 / 염철호 신부

염철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성서신학 교수)
입력일 2016-02-02 수정일 2016-02-02 발행일 2016-02-07 제 2981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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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1주일(루카 4,1-13)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파스카 성삼일을 준비하는 사십 일간의 기간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순절 동안 자신의 삶이 정말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었는지를 되돌아보며 다시금 부활을 가져다주는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걷겠다고 다짐합니다.

성경에서 사십이라는 수는 매우 중요합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뒤 하늘이 열려 밤낮으로 비가 내리며 땅을 씻어냈던 기간이 사십 일이었고(창세 7,12.17), 산봉우리들이 드러난 뒤 노아가 방주의 창문을 열기 위해 기다렸던 기간이 사십 일이었습니다(창세 8,6). 모세가 하느님과 계약을 맺기 위해 산에서 머물렀던 기간이 사십 일이었고(탈출 24,18),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을 한 것이 사십 년이었습니다(탈출 16,35 민수 14,34). 이렇게 보면 사십이라는 수는 정화의 시기, 기다림과 준비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이 기간을 거친 이들은 구원을 봅니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정찰대를 보내는데, 그들은 사십 일 동안 정찰합니다(민수 13,25). 그러나 그들 가운데 여호수아와 칼렙 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구원을 봅니다. 또한, 요나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니네베에 심판을 선포하신 뒤 사십 일 뒤에도 그들이 변화가 없다면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하십니다(요나 3,4). 이렇게 보면 사십이라는 수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구원을, 그렇지 못한 이에게는 심판을 준비하는 시기가 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하십니까?

만약,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만을 기준으로 구원과 심판이 결정된다면 우리 가운데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항상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함을, 그분의 도움 없이는 그 누구도 죽음을 이겨낼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 2독서는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그분께 의탁하라고 권합니다. 스스로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고 자만하지 말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복음이 이야기하듯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사십 일의 유혹을 이겨내시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으며, 우리의 죄를 뒤집어쓰고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십 일의 기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오로는 2독서에서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사순절 기간 동안 내가 무엇인가를 해서 하느님을 위로하겠다고 덤벼들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고,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겸손의 덕을 닦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믿는다고 말만 하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믿는다는 것은 진리, 곧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고백한 바를 실천하지 않는 이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는 이는 그것을 실천하는 이이며, 그런 이들이 구원으로 나아갑니다. 말하고 싶은 점은 다만, 하느님 도움 없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실천해 보겠다고 덤벼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 주일인 오늘 나로 하여금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유혹들이 무엇인지 떠올려 봅시다. 그 유혹들을 혼자서 물리치려 하십니까? 아니면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십니까?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우리 각자의 나약함을 주님께 고백하며, 주님의 자비와 도우심을 간구합시다.

염철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성서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