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물관 문화 순례]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 1

신정숙 수녀(인보성체수도회 새감연구소 소장),사진 인보성체수도회 제공
입력일 2015-11-24 수정일 2015-11-24 발행일 2015-11-29 제 2971호 1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인보’(隣保)  정신 구현한 창설자 발자취 엿본다
윤을수 신부 출처 가톨릭대학교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은 그에 의해 설립된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수도회가 유물관을 두고 있는 이유는 성체를 공경하고 성체성사에 박혀 있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마음 바르게 부지런히 살아가며 넘치는 행복을 전하라고 한 설립자의 뜻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또한 그분이 지녔던 참행복 영성의 향기를 교회와 세상과 나누기 위해서다.

유물 전시관 관람은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가능하며 신자를 포함해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고 있다. 사전에 연락을 해 놓으면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 안에 자리한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 전시공간 모습.

윤을수 신부(1907~1971) 유물 가운데 가장 먼저 소개할 것은 「라한사전」(羅韓辭典, Dictionarium Latino-Coreano)(1936년)이다. 1907년 충남 예산군 고덕면 용리에서 부친 윤상규 이냐시오와 모친 임 골롬바의 2남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윤 신부는 1920년 9월 13일 서울 용산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932년 12월 17일 명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서품 후에 장호원본당(현 충북 감곡본당) 보좌신부로 있으면서 「장호원 성가집」을 발간했다. 그 후 1937년 프랑스 유학 전까지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이때 윤 신부는 교리와 라틴어를 가르쳤고 「라한사전」도 이 시기에 편집, 발행했다.

「라한사전」 표지에는 라틴어「DICTIONARIUM LATINO-COREANO」라고 제목이 쓰여 있고, 서문과 약어부록, 본문 780쪽으로 구성돼 각 쪽마다 2단으로 편집돼 있다.

「라한사전」의 초판 발행일은 소화 11년 7월 31일, 즉 1936년이고 편집인은 윤을수, 발행인은 원순근이며 발행처는 서울 혜화동에 있는 성 니콜라오 신학교로 표기돼 있다. 인보성체수도회 유물관에 전시돼 있는 것은 똑같은 것을 1959년 경향신문사에서 다시 발행한 것이다.

윤을수 신부가 편찬한 「라한사전」 본문 중 일부. 모두 780쪽, 2단으로 편집했다.

윤 신부의 소신학교 제자였던 조응환 신부(1920~2002)의 증언에 의하면 윤 신부는 라틴어 교사였는데 라틴어를 아주 잘 가르쳤고 밤늦게까지 연구했다고 한다. 소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는 것이 계기가 돼 사전 발행으로까지 이어졌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하는 증언이다. 번역은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을 넘어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하고 매개해 준다는 의미에서 낯선 세계 간의 만남이고 뛰어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번역은 애초부터 두 세계의 완전한 일치를 기대하기가 어려운 일이기에 어려움과 고통이 따르는 일이다. 그 힘겨운 작업을 해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윤 신부는 서문에서 사전을 발행하게 된 동기에 대해 밝히고 있다. 그때 당시 사용하던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주교의 「라선소자전」(羅鮮小字典, Parvum Vocabularium Latino-Coreanum)으로는 라틴어가 본질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사전에 배분돼 있는 어구표현 또는 표현 방법이 너무나 옛날 방식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어구가 좀 더 풍부하고 시대에 적절한 사전을 발행하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능통하다고는 하나 조선말을 제대로 배워 본 적도 없고 더구나 숨어 지내며 사목활동을 해야 했던 외국 선교사들이기에 그들의 번역, 표현법, 어휘선택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라틴어를 전례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용어처럼 사용해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고 표현하고 싶은 당위성과 필요성이 컸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윤 신부가 신학교를 다니고 동성소신학교 교사로 재임할 당시 소신학교를 ‘라틴어과’라고 부를 만큼 라틴어는 소신학교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가르치는 과목이었다.

당시 교회의 공용어와 전례용어가 라틴어였기 때문에 사제가 되려면 반드시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 당시 신학교 내에서는 일상에서도 라틴어를 해야 했고 한국말을 사용하다 들키면 엄중한 벌을 받아야 하는 규정이 있을 정도로 라틴어 사용이 의무였다. 이 의무는 의외로 좋은 결과를 냈는데 용산신학교의 라틴어 수준은 로마 교황청에서도 인정해 줄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가 「라한사전」을 태동하게 하지 않았을까?

윤 신부가 쓴 사전의 서문에 보면 사전을 만들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주위 사람들의 권고와 지도가 있어 라틴어 연구와 사전에 관한 경험이 없음에도 사전을 발행하기로 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이 사전이 윤 신부 의도로만 제작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교회 내 지식인들, 특히 동성소신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사람들 사이에 그 필요성에 대해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고, 사전의 발행에 그들의 직간접적인 참여가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서문 말미에 사전 발행에 관해 많은 노력과 지지를 아끼지 않은 이들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는 임충신 신부(1907~2001), 안응렬(1911~2005), 이동구(1904∼1943), 장면(1899~1966)이 그 지지자들일 것으로 여겨진다.

라틴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할 만큼 라틴어에 익숙한 조선 사람인 윤 신부에 의해 번역된 「라한사전」이 갖는 사전학과 언어학적 관점에서의 높은 가치와 중요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이제부터 시작해야 할 연구과제다. 이 사전은 1990년대까지 통용된 유일한 라틴어-우리말 사전이었다. 「라한사전」에 등재된 한국어 단어들이, 물론 그 의미가 없어지거나 확장된 것이 있긴 해도, 발간 후 80년이 지난 지금에도 큰 변동 없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우수성은 충분히 증명된다고 본다.

※문의 031-334-2901~2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

신정숙 수녀(인보성체수도회 새감연구소 소장),사진 인보성체수도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