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방주의 창] 내 생각과 말아, 밤새 안녕? / 장해랑 교수

장해랑(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입력일 2015-10-06 수정일 2015-10-06 발행일 2015-10-11 제 2964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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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인터넷상의 명예훼손에 대해 제3자도 심의를 신청할 수 있도록 통신심의규정을 개정하기로 결정하고 입안예고에 들어갔다. 일반 시민들은 잘 모르지만 이 사안은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를 심각히 침해하는 조처다. 지금까지 명예훼손은 당사자나 위임받은 대리인만이 제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제3자가 명예훼손 심의를 요청하면 방심위가 심의해 기사를 차단하거나 자체적으로 삭제를 결정할 수 있게 됐다.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대기업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발표했을 때 누군가 방심위에 ‘우리 대통령님(회장님)을 명예훼손했대요’ 제소하면 방심위가 심의해 제재를 내린다는 것이다.

그나마 여론을 살피느라 조심하던 권력자, 사회지도층, 종교지도자, 기업가들은 이제 세상 눈치 볼 필요 없이 행동할 수 있게 됐다. 자리하나 차지하기 위해 줄 선 사람들이 나서서 충성심 경쟁을 할 테니까. 어떤 공개비판도 불가능해졌다. 편 가르기가 일상사인 요즘 풍토에서 제 편 감싸기에 바쁜 이들이 합리적 토론이나 양식도 없이 비판을 감싸 줄 테니까. 대통령이나 장관, 정치가들도 안심하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됐다. 정권의 눈치를 봐야 하는 힘없는 정부기관 방심위와 거수기 심위위원들이 알아서 부정적 여론들을 삭제하고 차단해 줄 테니까.

국정원의 해킹사건이 엊그제 일이었다. 전 국민을 사찰대상으로 국가정보기관이 앱을 심고 와이파이망을 통해 모든 개인 정보를 빼 갈수 있다는 사실은 끔찍했던 유신시대의 암흑기를 떠올리게 했다. 그 해킹사건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실체도 밝혀지지 않은 채 마무리됐다. 그리고 인터넷 제3자 명예훼손까지. 이제 국민은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말라고 강요한다. 제 의사조차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는 동물농장에 살면서 우리는 때론 진행되는 실상을 몰라서, 때론 알면서도 스스로 자신을 합리화하며 살아간다, 내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침묵하면 세상은 썩고 나는 혼자가 된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 그 순간에 이르자 / 나서줄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독일 신학자 마틴 니묄러(1892~1984)

역사는 가진 자, 힘 있는 자들의 금기와 성역에 도전한 민초들의 싸움과정이었다. 이 땅의 민주주의와 언론자유도 피 흘려 얻었다. 그 언론은 지금 어디,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 공영방송을 보면 세상이 읽히지 않는다. 세월호의 고통도, 메르스의 심각성도, 국정원의 사찰도 없다. ‘땡박 뉴스’가 되살아나고 세상 이슈의 아젠다 설정기능을 가진 심층탐사, 시사 프로그램은 사라졌다. 고통받는 약자들의 목소리도 없다. 빈자리를 과거성찰도, 미래비전도 없는 광복 70년 합창대회와 먹방,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들이 채운다. 예능프로그램이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이영희 선생 말을 빌면 ‘방송은 저널리즘과 아티즘 두 날개로 난다.’ 저널리즘이 사라지고 예능만 살아남은 방송은 말 그대로 바보상자일 뿐이다. 바보상자는 그저 웃는 우매한 백성을 바라는 권력욕망과 맞닿아 있다. 다시 생각과 말조차 두려워해야 하는 언로가 막힌 세상이 올 줄이야. 무심한 사이에 웃을 수조차 없는 한심한 일들이 방송현장에서 버젓이 진행 중이다. 언론자유 세계 60위라는 부끄러운 위상이 현재를 웅변한다. 잊지 말자, 지금도 해직된 기자, 피디들이 생계를 걱정하고 비제작부서로 밀려난 제작자들이 피울음을 토하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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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해랑(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