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분단 70주년 특집] 서울 민화위, 북한·중국 접경지대 탐방

김근영 기자
입력일 2015-08-25 수정일 2015-08-25 발행일 2015-08-30 제 2959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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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수 없는 ‘형제의 땅’,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통일되지 않은 남한은 고립된 ‘섬나라’일 뿐입니다”
북한·중국·러시아 국경 맞댄 방천부터

압록강 국경도시 단둥까지 1400㎞ 여정

철조망·보초 마주하며 ‘평화’ 소중함 느껴

압록강 마주하고 있는 단둥-신의주

북·중 교역 70% 이뤄지는 핵심 ‘통로’

중국 개방·북한 폐쇄 정책으로 개발 큰 격차

암흑에 갇힌 북녘 위해 꾸준한 기도 필요

서울 민화위 탐방단이 8월 16일부터 5박 6일간 거쳐간 북한·중국 접경지대.

광복과 동시에 분단된 지 70년. 더 늦기 전에 평화를 향한 대장정을 시작해야 한다.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위원장 정세덕 신부, 이하 서울 민화위)가 ‘함께하는 우리, 함께 가는 길’ 주제로 8월 16일부터 5박 6일간 북한·중국 접경지대로 떠난 이유다. 1400㎞ 국경지역을 거쳐 귀국한 참가자들의 의식은 인천공항에서 출발할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현장으로 가보자.

■ 걷다, 북·중 접경지대를

백두산 천지, 마음의 벽이 무너지다

“우와~.”

누구랄 것 없이 가슴이 벅차 올라 탄성을 내지른다. 설명이 사라지는 장관이다. 처음 대하는 풍경 앞에 모두가 언어를 잊어 버렸다.

8월 18일 오전. 서울 민화위 일행은 백두산 천지에 다다랐다. 천지를 보려면 집안 삼대가 복을 쌓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백 번 와서 두 번 보고 간다’해서 백두산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날씨 변덕이 그만큼 크기 때문인데, 이날만큼은 백두산이 말끔한 얼굴을 드러냈다. 9인승 승합차에 오른 참가자들은 꼬불꼬불한 급경사 길을 거쳐 천지 언저리에 내렸다. 이내 구름이 몰려오며 시야를 가려버린다. 행여나 천지를 보지 못할까 마음 졸이던 일행들은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천지에 도착하는 순간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백두산에 오르기 위해선 네 가지 방법이 있다. 북한 삼지연에서 오르는 동파(東坡) 코스를 뺀 세 길(북파·서파·남파)은 중국 쪽에서 출발한다. 이 가운데 북파는 백두산 등산 코스로 가장 먼저 개발됐고, 서파는 가장 넓은 시야로 천지를 확보할 수 있는 코스다. 서울 민화위 일행은 지난 2009년 개발된 남파(南坡) 길에 올랐다. 북·중 접경지역과 매우 가까운 코스인데다 관광객들이 많지 않아 자연훼손이 거의 없는 곳이다.

해발 2750m,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위엄은 참가자들을 잠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할 때부터 이어져 온 서먹서먹했던 분위기는 이 자리에서 와르르 무너졌다. 아이들처럼 이리저리 살피며 눈에 띄는 사람과 얼싸안고 함께 사진을 찍어댔다. 남파 길은 처음이라던 오규열 교수(서울디지털대 중국학과)는 천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었다. 하산 길을 재촉하는 안내 소리에도 참가자들은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서울 민화위 탐방단이 백두산에 올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일행 뒤로 백두산 천지가 보인다.

고구려, 통일 연결고리

8월 19일.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으로 가는 도로엔 성인 남성 평균 신장보다 큰 옥수수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고구려 초기 400년 도읍지 지안. 이곳의 민가들은 비슷한 크기에 동일한 모델로 지어져 있었다. 담장의 높이는 비슷비슷했고, 마을엔 상업광고가 전혀 없었다. 집집마다 담장에 삼족오(三足烏)와 연꽃 같은 고구려 고분벽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곳엔 광개토대왕(고구려 20대 왕)의 숨결이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

서울 민화위 일행이 찾은 광개토대왕비는 유리로 지은 비각 안에 갇혀 있었다. 6.39m 규모의 이 비석에는 무려 1775개의 문자들이 산천을 휩쓸고 간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찬양하고 있었다. ‘동양의 피라미드’라는 별칭을 지닌 장군총은 크고 웅장했다. 장군총이 장수왕의 무덤이라는 설은 근거가 약하지만, 장군총은 광개토대왕비와 가까운 거리에서 우람한 힘을 분출하고 있었다.

지안에는 20여 기의 고구려 벽화고분이 퍼져 있지만 일반 관람객에 개방된 곳은 오회분(五會墳) 5호묘뿐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몸이 금세 서늘해진다. 돌로 된 큰 방에는 청룡·백호·주작·현무가 그려져 있다. 화가가 조금 전 작업을 끝낸 듯 색감이 풍부하여 마치 살아있는 듯했다. 아쉽게도 원본에서 장식된 보석들은 하나만 남기고 모두 도굴됐다.

지안에 있는 고구려 유적들은 여전히 관리부실로 남루한 모습이었다.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가지고 오고 싶을 정도다. 광야를 달리던 광개토대왕의 기상은 유리 비각에 갇혀 꼼짝하지 못했고, 한반도와 중국으로부터 소리 없는 푸대접을 받고 있었다.

‘동양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거대한 돌무덤 장군총 앞에서 현지 안내인 설명을 듣고 있는 참가자들.

■ 바라보다, 그들을

두만강 물 떠서 마라도로

8월 17일.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동남부에 위치한 도시, ‘도문’. 인구의 약 59%가 조선족이라 불리는 한민족이 차지하고 있는 이곳에서 서울 민화위 일행은 두만강 뗏목에 올라탔다.

뗏목이 방향을 틀어 출발지로 되돌아올 때쯤 염수현(안드레아·42)씨가 갑자기 신발을 벗고 두만강에 발을 담갔다. 그러곤 두만강 물을 생수통에 담았다. 염씨는 “북쪽 끝에 있는 두만강 물과 남쪽 끝에 있는 마라도 강을 합치려고 한다”며 잠깐 동안 기도에 잠겼다. 염씨는 8월 20일 압록강에서 유람선을 탈 때도 압록강 물을 담았다. 이번 일정이 끝나면 염씨는 마라도 여정에 나설 예정이다.

접경지역을 달리다보면 중국 군인들의 검문을 수시로 받는다. 관광객으로 위장한 북한이탈주민들과 브로커를 걸러내기 위해서다. 이들은 여권을 통해 일일이 승객들의 얼굴을 대조해보기도 하고, 대충 훑고 통과시키기도 한다. 한국어를 구사하는 군인들이 접경지역에 배치된다. 승객의 대화를 엿듣고 북한이탈주민을 선별할 수 있기 때문. 긴장이 팽배한 분위기였지만 서울 민화위 일행은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 방천은 북·중·러 3개국 국경이 맞닿은 곳이다. 서울 민화위 탐방단 뒤편 오른쪽은 두만강. 강 끝에 러시아와 북한을 잇는 북·러 친선교가 보인다. 왼쪽은 러시아 호수다.

탐방 참가자 김상미씨와 임순희 박사가 함경북도 서북쪽에 위치한 회령시(市)를 가리키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압록강변 따라

“저기가 북한입니다.”

평화나눔연구소 임강택 소장이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을 때마다 참가자들은 미어캣처럼 차창 밖을 바라본다. 모국에 대한 끌림이다. 갈 수 없는 형제의 땅에 눈길이 가는 게 당연했다. 어느 곳이 북한인지 구별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민둥산이 있는 쪽이 북한이다. 산꼭대기까지 뙈기밭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주인 없는 국가 임야지에서 북한 주민들은 비공식적으로 밭농사를 짓고 있었다. 서류상으론 산인데, 북한 당국은 뇌물을 받고 이를 묵인한다. 뙈기밭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양은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압록강변에 위치한 양강도 혜산시(市)는 중국과의 국경거리가 매우 짧아 탈북의 최적지로 여겨져 왔다. 혜산 앞 압록강 폭은 비가 내리지 않을 경우 30m도 안 되는 곳이 많고, 겨울이면 강물이 두껍게 얼어붙어 마음만 먹으면 10초 만에 중국으로 건너갈 수 있다. 신의주 다음으로 큰 도시인 혜산에선 한 집 건너 하나씩 탈북자들이 있다는 말이 나올 만큼 탈북이 일상화된 곳이다.

서울 민화위 일행을 태운 버스는 혜산에서 지안까지 북·중 사이 압록강 국경을 따라 산악도로로 달렸다. 도로는 압록강변으로 바싹 접근했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압록강 국경은 삼엄하진 않았지만 월경이탈자를 막기 위한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북한군 병사들이 보초 서는 모습도 보였다. 많은 북한 주민들이 강가에 내려와 빨래를 하거나 머리를 감고 있었다.

버스가 강에 바짝 붙을 때 건너편 초병이 걸터앉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정면으로 우리를 주시했다. 반면 빨래를 하던 북한 주민들은 결코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나는 북한 주민을 바라봤지만, 북한 주민들은 절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안타까웠다. 반면 그 북한 군인의 시선은 나의 시선과 부딪혔다.

그 북한 군인의 나이가 몇인지, 군 생활은 할 만한지, 여자 친구는 있는지, 남한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다. 같은 또래 남·북 청년들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적 현실이 기성세대들이 전해준 훌륭한 우리의 유산일까.

‘통일’보다 강 건너편에서 보초 서는 북한군 병사의 생애 속에서 인간다운 가치와 희망이 온전히 구현되기를 바랐다. 생명을 고귀하게 여길 줄 아는 단순한 평화와 일치는 불가능한 것인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한참 후에, 놀랍게도 두만강 위를 따라 거대한 뗏목이 줄줄이 물길을 타고 넘어가고 있었다. 윤여상 박사(북한인권정보센터)는 “육로로 나무를 실어 나르지 않고, 뗏목으로 나무를 실어 나르는 이 방법은 조선시대에 사용하던 방식”이라며 “높은 사망률 때문에 일제 강점기 때 사라졌는데 아직까지 하고 있다”고 말했다. 뗏목은 혜산에서 출발해 단둥까지 약 15일 여정을 거친다. 한 뗏목 당 약 12명이 타고 혜산에서 출발하는데 단둥에 도착할 때면 절반은 사망한 상태라고 한다.

뗏목은 물안개가 내려앉은 북녘 풍경에 아름답게 어울렸지만, 마냥 감탄할 수는 없었다.

서울 민화위 사무국장 황정숙 수녀가 호산장성에서 북한 초소를 바라보고 있다.

■ 그리다, 한반도의 미래를

8월 20일, 일행은 마침내 압록강 국경도시 단둥에 도착했다. 압록강 철교의 녹슨 철강재들이 서늘한 비린내를 풍겼다. 1911년 만들어졌지만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으로 끊어져 중국 쪽 절반만 남아 압록강 단교(斷橋)라고도 불린다. 그 단교는 더 이상 풍요로움을 실어 나르는 구원의 다리가 아니었다.

흉측한 상처를 입은 압록강 단교 바로 옆에는 1943년 완공된 조중우의교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신의주와 단둥을 잇는 유일한 육로이자 무역통로다. 북·중 교역의 70%가 신의주와 단둥에서 발생하는데, 그날도 컨테이너 차량들이 줄이어 신의주로 들어가고 있었다.

북·중 국가 간 협력사업은 중단됐지만, 민간차원의 교류는 현재 진행 중이다. 미디어 속 북한과 실제로 목격된 북한의 모습은 분명히 달랐다.

정세덕 신부를 비롯해 임순희 박사(평화나눔연구소 연구위원)와 김계훈 교수(서울시립대 환경원예학과) 등 참가자들은 다리가 끊어진 지점에서 신의주를 바라보며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우리는 현재 어떤 시대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지, 우리는 어째서 70년 전처럼 아직도 서로 으르렁대고 있는지, 이 무서운 적대관계의 뿌리는 무엇인지, 민족의 화해라는 이름으로 일치될 수는 없는 건지, 분단은 일상의 정서로 영영 고착되고야 마는 건지…. 단교는 가혹하게 묻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큰 소리로 북녘 동포들을 불렀다. 대답은 커녕 메아리도 없었다.

단둥에 있는 북한 식당 ‘평양관’에서 이번 여정의 마지막 저녁식사가 마련됐다. 압록강 공원 인근에 위치한 이 식당은 중국인들을 위해 북한 당국이 허가한 곳이다. 인공기를 왼쪽 가슴에 달고 있던 북한 여성 종업원들이 북한 억양으로 밝게 웃으며 참가자들을 맞이했다.

식사 도중에 간단한 공연이 펼쳐졌다. 편하게 개량한 한복 차림에 앳된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무살을 갓 넘긴 듯 했다. 이들은 시작 노래로 ‘아리랑’을 불렀다. 믿기지 않는 성숙한 선율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몇몇 참가자들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고향의 봄’이 흘러나오는 순간, 노래를 부르는 여성 앞에 있던 테이블 전체가 울음바다가 됐다. ‘다시 만납시다’로 노래가 끝나자, 전체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공연 내내 눈물을 쏟아냈던 우리은행 김상미(48)씨는 “즐거워야 하는 저녁식사 자리이고 흥을 돋우기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데, 오히려 가슴만 아팠다”며 “공연하는 이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한민족이라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우리은행 박은진(아가다·34)씨도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현실을 마주하면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며 “기존에 가지고 있던 나의 기준과 너무 차이가 나서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온 단둥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발해만의 작은 어촌에 불과하던 단둥은 대도시가 됐다. 웅장한 고층건물 숲에 네온사인이 번쩍거렸다. 1970년까지만 해도 신의주에 의존해 먹고 살던 도시, 단둥. 중국의 개방과 북한의 폐쇄가 상황을 역전시켜 지금은 단둥이 신의주를 지배하고 있다.

사람들과 자동차가 뒤엉킨 광장 너머로 강이 흐른다. 오리 머리처럼 녹색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 ‘압록’(鴨綠)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긴 강(803.3㎞)인 압록강은 백두산 남쪽 기슭에서 발원해 서해를 향해 흐른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압록강 너머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강 너머 북한은 여전히 가늠할 수 없는 침묵의 암흑 속에 쌓여 있었다. 단둥과 너무도 다른 한반도의 끝 신의주는 그렇게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압록강 단교. 신의주 쪽으로 끊어진 다리가 보인다.

■ 와서 보라

한국전쟁으로 한반도는 두 동강 났고, 우리는 분단민족이 됐다. 이번 여정의 출발지인 훈춘을 거쳐 다다른 방천은 북한·중국·러시아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이다. 서울 민화위 일행은 남북이 육·해·공으로 연결되어 한반도가 중국과 유라시아 3면으로 연결되지 못하면 ‘섬나라’로 고립될 것이라는 지정학적 현실을 직시했다. 중국 동포 안내자 최림호씨는 소수민족의 설움을 토해냈다.

“조선족들은 통일을 간절히 바랍니다. 소수민족들인 우리들은 어딜 가나 막혀 있잖아요. 훈춘 같은 지역이 개방되면 그 지역이 얼마나 개발되겠습니까. 두만강 따라 무역을 할 수도 있고, 내륙을 따라 도시로 들어갈 수도 있고요. 백두산 인근만 보더라도 경제 시스템이 너무 취약해요.”

백두산에서 발원한 압록강은 서해로, 두만강은 동해로 흘렀다. 때론 남으로, 북으로, 정 반대 방향으로. 험한 계곡을 돌고, 육중한 돌부리에 속도가 느려지기도 했지만 결국 바다의 큰 품에 안겼다.

1400㎞의 국경을 따라 나선 서울 민화위 일행도 민족의 화해를 위한 과제를 떠안게 됐다. 한국으로 가면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인천공항으로 오르는 참가자들의 머릿속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각각의 화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번 행사를 기획한 임강택 소장은 “이번 여정을 마치면서 얻은 깨달음이 북한 땅을 다시 찾으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들 만남이 여러 동기로 이뤄지긴 했지만, 함께 나눴던 감동과 즐거움, 고단함 등을 통해 좋은 기억을 유지하자”며 “이번 경험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북한 관계에서 연관이 될 것”이라고 독려했다.

행사에 참가한 우리은행 위가영(22)씨는 “통일을 굳이 해야 하는지 의문이 있었는데, 이번 여정을 통해 마음의 벽이 많이 허물어졌다”며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북한 문제를 바라보겠다”고 말했다.

굳건히 막힌 북한의 문은 한 번의 제안으로 쉽사리 열리진 않을 터. 의지와 전략, 끊임없는 기도를 봉헌하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건 퇴보다. 분단 70년, 우리는 언제까지 섬으로 살아야 할까.

■ 인터뷰 / 서울 민화위원장 정세덕 신부

“한반도 평화 위한 신앙인 역할 고민해야”

“북한을 ‘마음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북한을 대할 때 주로 정치적·사회적·객관적 시각을 견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관적이더라도 마음으로 느끼고, 각자의 시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직접 와서 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참동안 압록강을 바라보던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장 정세덕 신부는 ‘직접 와서 보고, 느끼는 것’이 변화의 핵심동력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이하 서울 민화위)가 이 행사를 준비한 이유이기도 하다. 북중 접경지역을 걷다보면 한 민족·한 혈육이라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것.

정 신부는 여러 차례 북중 접경지역을 방문했지만, 40여 명을 이끌고 와보긴 이번이 처음. “평화나눔연구소 연구위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행사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과 평화, 민족의 화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함께 나눌 수 있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이는 성직자·수도자들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닙니다. 평신도들의 자발적 참여가 좋은 결과로 이어집니다. 평화나눔연구소 연구위원들은 각자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1년 전부터 행사를 기획하고 두 달 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참가자 절반인 우리은행 직원들이 대부분 비신자라는 부분도 세심하게 고려됐다. 정 신부는 신자와 비신자들이 혼재된 참가자들과 함께 행사를 이끌어가는 동안, 종교 관련 언급이나 행동을 결코 강요하지 않았다. 매일 새벽미사와 아침강복, 식사 전·후 기도만 충실히 했다.

기적은 일정이 절반 가량 지나면서 벌어졌다. 비신자 참가자들이 식사 전·후 기도에서 “아멘”을 외치기 시작한 것. ‘민족의 화해’를 위한 활동이 ‘복음화’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정 신부는 참가자들의 얼굴 표정이 하루하루 변화하는 것을 보며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청년들을 위해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싶다는 속마음도 내비쳤다. 그들이 교회의 미래이기 때문.

“청년들이 ‘마음으로’ 북한을 바라보는 게 언젠가 현실이 됩니다. 청년들뿐 아니라 젊은 사제·수도자·신학생들과 함께 다시 이곳을 찾으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정 신부는 때마침 경기도 연천에서 벌어진 포격 소식을 듣고 깊은 우려감을 나타냈다.

“우리는 뉴스나 미디어에서 들은 부정적 이야기를 북한 주민들 모두에게 전가해서는 안 됩니다. 북한에서 소외된 사람들 삶에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5년 전 겨울밤. 정 신부는 북한의 두 번째 도시라는 신의주가 암흑에 잠겨있는 모습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반면 정 신부가 발 디디고 있는 중국 단둥 땅엔 휘황찬란한 불빛이 만연했다.

“당시 영하 30도 이상 내려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는데, 압록강 건너 굴뚝엔 연기 하나 피어오르지 않았어요. 저 안에도 사람이 있을 텐데.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들에게 희망이란 무엇일까, 저들에게 과연 하느님이란 누구일까…,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을 수 없었죠.”

정 신부는 이날 밤을 계기로 신자와 비신자 모두에게 북한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애끓는’ 노력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북한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뉴스나 미디어에 의해 각색된 소식이 아니라, 진실을 볼 수 있는 우리만의 고유한 시각이 필요합니다. 서울 민화위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평신도들의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고, 복음을 좀 더 효과적으로 선포할 수 있는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만들어 갈 예정입니다.”

김근영 기자 (gabino@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