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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특집] 해설

김진영 기자
입력일 2015-08-25 수정일 2015-08-25 발행일 2015-08-30 제 2959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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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박해로 희생… ‘순교’ 입증할 자료 확보 절실
 평양교구 사제·평신도 다수
 이북 현장조사 어려운 상황
 신자들 관심·기도 필요한 때
“현대적 순교 개념 적용돼야”
8월 19일 공개된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는 남북분단과 한국전쟁 중 희생된 인물들이 대부분으로 한국교회 ‘근·현대 신앙의 증인’이라 불린다. 이 81위 시복 대상자들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2007년부터 준비해온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 38위와는 별도의 인물들이다.

이번 시복 대상자들은 조선왕조 치하 순교자들과 달리 순교 사실을 목격하거나 입증할 증언자, 새로운 증언 혹은 사진, 문헌 자료들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시복시성주교특위에서는 이번에 공개하지 못한 대상자들의 사진은 물론 순교를 입증할만한 관련 자료들이 제출되길 기다리고 있다. 단, 관련 증언은 시복 법정이 열린 이후에 수집된다.

시복 대상자들 대부분이 한국전쟁을 전후해 공산당의 박해로 순교하거나 행방불명된 이들이란 점은 시복 추진에 큰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처음 근·현대 시복 후보자들을 조사할 때는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들도 대상 범주에 넣었으나 선정 과정에서 ‘순교자’들로 압축돼 그들의 죽음에 대한 입증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때문에 2013년 교황청 국무원이 7월 1일자 인물연감을 통해 60여 년 전에 실종됐던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의 사망을 공식 인정한 것은 81위의 시복 절차를 장애 없이 진행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시복 대상자들이 사망했다고 밝혀져도 이 죽음이 순교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 답하긴 쉽지 않다. 조선시대 순교자들은 박해자와 신앙증거자, 신앙고백과 그에 따른 죽음 등 전통적으로 규정한 순교의 조건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지만, 전쟁과 공산주의에 연결돼 피살된 이들의 경우 전통적 순교 개념으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81위 시복 청원자 김정환 신부(대전교구 내포교회사연구소장)는 “81위 시복 추진 대상자들은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 발생한 순교 사건 안에 있으므로 현대에 이르러 폭넓게 적용되는 순교 개념을 적용할 수 있으리라 본다”고 밝혔다. 아울러 “남북이 여전히 분단되고, 남한 내에서도 이념논쟁이 계속되고 있어 81위 시복 추진은 자칫 종교적 반공주의의 표출, 혹은 이념 논쟁의 사례로 이용될 수도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이어 김 신부는 “81위 시복 대상자들이 처했던 시대적 상황을 현재의 시간 속에서 고민하며 그들의 신앙 증거에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전했다.

남북이 여전히 분단돼 있어 휴전선 이북 지역에서 순교한 이들에 대한 현장 조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복에 대한 신자들의 관심과 자료 제출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이다.

대상자 분석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중 주교는 2위, 사제는 48위, 신학생은 3위, 수녀는 7위, 평신도는 21위다. 순교형태는 피랍 30, 피살 37, 병사 혹은 옥사 13, 생매장 1이다. 1945년 10월 체포돼 피살된 강창희 야고보를 시작으로 18명이 전쟁 전에 피랍됐고 그 중 1949년 1월 체포돼 옥사한 백응만 다마소 신부를 제외하면 모두 평양교구 소속 사제 및 평신도들이다. 분단 직후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천주교 주요 인사들에 대한 체포가 조직적으로 진행됐음을 보여준다.

전쟁 초기에는 북한이 승리를 장담하고 있어 북한지역 주요 인사들을 연금시키는 정도에 그쳤지만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본격적인 체포와 처형이 시작됐다. 신자들을 두고 갈 수 없어 남아있던 주교와 사제들은 체포되거나 처형됐고, 살아남은 이들도 ‘죽음의 행진’을 겪은 후에 중강진에 수감되어 있다가 옥사했다.

시복 대상자 중 송해붕 요한 세례자는 북한군의 전쟁 수행과 무관한 특이한 사례다. 그는 고향 경기도 부천구 계양면 귤현동에서 야학을 운영하며 한문과 천주교 교리교육을 병행했다. 그의 야학이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마을의 개신교 유지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됐다. 유지들은 전쟁 중에도 몰래 야학을 계속하던 송해붕을 ‘유물론적 공산주의자’로 누명을 씌웠고 1950년 10월 11일 한국 치안대원들에 의해 총살됐다.

김진영 기자 (nicolao@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