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방주의 창] 하느님을 위한 ‘비움’(Vacare Deo) / 인영균 신부

인영균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
입력일 2015-08-25 수정일 2015-08-25 발행일 2015-08-30 제 2959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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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휴가의 계절이다. 산과 바다를 찾아 나선다. 유난히 무더웠던 올여름 내내 우리 수도원에는 피정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방을 예약하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한다.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개인적으로나 가족이 함께 수도원을 찾아와 고요함 속에서 지내다 돌아갔다. 피정이란 말은 피세정관(避世靜觀)에서 나왔다. 분주한 일상생활을 떠나 조용한 곳에 가서 기도를 통해 고요히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서울 어느 큰 본당에서 초등학생들이 단체 피정을 왔는데 아이들은 피정 내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신나게 자유를 만끽했지만 젊은 수사들은 꼬마들을 조용히 시키느라 많이 힘들어했다. 아이들은 매일 학교와 집, 학원을 오가는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수도원에 왔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떠날 때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과 다시 왔으면 참 좋겠어요. 그러나 아마 어려울 거예요. 저도 바쁘지만 엄마도 아빠도 무척 바쁘거든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너무 바쁘다. 쉴 때도 TV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보며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 다들 바쁘기 때문에 생각할 틈도 자신에게 베풀지 못한다.

왜 모두 바쁠까? 무엇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경쟁 사회에서 남들보다 뒤처진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더욱 우리 자신을 바쁘게 만든다. 경쟁의 덫에 걸려 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한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하는 척도가 있다. 자살률과 출생률 지표다. 전자는 한 국가의 현재를, 후자는 그 미래를 판단하는 지표다. 2013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압도적인 1위고 증가율도 월등히 높다. 출생률은 세계 최하위다. 출생률이 최하위인 것은 미래에 아이를 낳아 키우기가 더 어렵다는 증거다. 전 세대에 걸쳐 사람들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주위에서 살기 정말 힘들다는 소리만 들린다. 특히 20~30대 자살이 많은데 그만큼 우리나라는 살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 세대를 이른바 ‘삼포 세대’, 곧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세대라고 한다. 좌절감과 상실감의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우리 사회는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달려만 왔다. 이제 멈춰야 한다. 그리고 둘러봐야 한다. 그런 다음 다시 움직여야 한다. 멈춤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자. 멈춤은 큰 호흡과 같다. 들숨과 날숨의 그 단순함을 느끼는 것이다. 호흡의 단순함에서 보면 생명은 단순함에서 시작된다. 멈춤은 쉼을 뜻한다. 쉼은 복잡함에서 단순함의 진리로 우리를 이끈다. 비본질적인 것에서 본질적인 진리로 인도한다.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진리로 걷게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쉼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만이 쉼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더 바쁘다. 또한 자연이나 수도원에서만 쉼의 공간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외적인 공간은 이차적이다. 수도 영성에서 ‘Vacare Deo’라는 아름다운 라틴어 문장이 있다. 하느님을 위해서 혹은 하느님이 사용하실 수 있도록 시간이나 공간을 비워놓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만 우리는 휴식의 공간과 시간을 발견한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장애우 공동체 ‘라르슈’(L’Arche)를 세운 장 바니에는 우리의 무관심과 무지를 깨닫게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샘이 있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에게 지능이 있음을 알고 물건을 만들 수 있음을 알며, 감정, 욕망, 충동이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다정한 샘, 생명을 줄 샘, 하느님의 사랑을 줄 샘이 있음을 모릅니다.” 기도는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께 시간과 공간을 바치는 법(Vacare Deo)을 배울 수 있게 한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말은 기도하기 싫다는 말이다. 마음으로 기도할 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고 비록 번잡하고 피곤한 생활이라도 주님께서 우리 삶 속에 들어오시어 우리의 삶을 위로하시고 인도하실 수 있다. 마침내 우리의 전 실존이 주님께 속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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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영균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