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2014년 8월을 추억하다/교황님을 만난 후…

입력일 2015-07-28 수정일 2015-07-28 발행일 2015-08-02 제 2955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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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해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떠난 지도 꼭 1년이 흘렀다. 교황 방한 1주년,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났던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지난해 8월을 추억하며 우리는 또다시 교황을 그리워한다.

日위안부 피해 김군자 할머니

가진 것 모두 가난한 이웃과 나눴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요안나·90·나눔의 집) 할머니가 지난해 8월 18일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났던 것도 벌써 1년이 흘렀다. 할머니는 ‘좋았지’라는 말로 당시를 떠올렸다. 전날 밤잠도 설치며 기다렸던 ‘교황님’이다.

“훌륭하고 만날 수 없는 분이잖아. 가까이에서 뵐 수 있어서 참 좋았어. 말할 수 없이 좋지, 그럼 안 좋아? 손을 잡아주시는데 참 편안해지더라고.”

할머니는 그나마 들리는 오른쪽 귀로 질문을 듣고 그때의 감동을 짧은 답변과 오랜 침묵으로 대신했다. 미사 당시 받았다는 묵주도 꺼내보였다. 요즘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 성당을 나가지 못하고 이 묵주로 방에서 기도하고 있다.

할머니는 올해 5월 수원교구 성심장학회에 장학기금 1억원을 기부했다. 자신의 전 재산이다. 매월 나오는 정부지원금을 모아 아름다운 재단 등에 기부했던 할머니는 지난해 12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을 만큼 많은 기부를 했다. 할머니에게 교황을 만났던 일은 ‘가난한 이를 돕겠다’는 그 착한 마음을 확인받은 소중한 자리였다.

“나는 고아야. 13살 때 동생 둘 데리고 고아가 됐어. 그래서 배우지를 못했잖아. 나 같은 사람이 좀 적었으면 하는 바람에 학생들 쓰라고 기부하게 된 거야.”

고아로 위안부로 끌려가 수모를 겪고, 한국에 돌아와 동생들을 돌보며 평생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던 할머니는 ‘가난해서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됐다’고 했다.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를 만나 장학기금을 전달할 때도 “대단하지도 않은 것으로 큰일을 벌인 것 같아 죄송하다”며 겸손해하기도 했다.

할머니의 선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올해 다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 500만원을 모아 ‘네팔 대지진 피해자들’에게 성금을 전달했다. 정부지원금과 사회 각계로부터 후원받은 금액이다. 할머니들의 성금은 네팔 카트만두와 신두팔촉 등에 제공되는 긴급구호물품과 피해지역 복구기금으로 쓰였다.

“교황님 만난 것을 어떻게 잊어버리겠어. 제일 좋은 기억인데. 요새 성당에 가고 싶은데 걷지를 못하니까 잘 못 가게 되네. 앞으로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계속 기부하고 싶어.”

<오혜민 기자 oh0311@catimes.kr>

북한이탈주민 박주희씨

복수심 대신 ‘화해와 용서’ 가슴에 품어

“세례식을 준비하는 동안 교황님이 한국에 오신다는 소릴 들었어요. 교황님은 단순히 천주교의 ‘총대장’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지난해 8월 15일 아들과 함께 경기도의 한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북한이탈주민 박주희(체칠리아·39)씨.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에서 박씨에게 “시복식 미사에 참례하겠느냐”고 묻자 냉큼 “당연히 가아죠”라고 대답했다. 세례의 감동이 채 가시기 전이었다.

광화문에 도착해 명찰을 받고 제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배정받았다. 20m도 안 되는 듯했다. 그곳이 자신의 자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수녀님들까지 바닥에 앉는데, 저는 의자에 앉았어요. 제 앞줄엔 국회의원들도 앉아있더군요. 북한에선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죠.”

교황이 주례하는 미사 내내 박씨 마음을 가득 채운 말마디는 ‘화해와 용서’였다. 2년 전 남한 땅을 밟은 박씨는 말투 때문에 늘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자신보다 늦게 입사한 회사 동료가 임금을 더 가지고 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북한에선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 ‘지난날을 잊으면 안 된다’ 등 항상 ‘복수’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어요. 화해하고 용서하는 사람은 바보 취급을 받아요. 그런데 교황님께서 화해와 용서를 말씀하셨죠.”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했다. ‘저렇게 높은 교황님도 우리 같은 사람 말을 들으려고 몸을 낮추시는데, 내가 과연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게 무엇이란 말인가. 돈 몇 푼 더 벌기 위해 내 마음을 더럽힌 것이 아닌가.’

다음날부터 나이 어린 회사동료 뿐 아니라 전 직원들에게 존댓말을 하며 예우했다. 심지어 상대방이 선입견으로 가시 돋친 말을 할 때도 받아들였다. 교황이 강조한 ‘화해와 용서’라는 말마디가 계속 생각났기 때문. 점차 회사동료들은 박씨의 부족한 부분을 메꿔주기 시작했고, 박씨도 흔쾌히 그들을 도왔다.

“(북한에 있을 때) 저는 누군가로부터 험담하는 소릴 들으면 사연을 알아보기도 전에 당장 상대방을 찾아가 멱살부터 잡았어요. 시복식 미사 이후로 제 성격이 점점 달라지고 있어요.”

<김근영 기자 gabino@catimes.kr>

AYD 한국대표 박지선씨

행복한 삶에 대한 답을 얻었어요

“교황님을 뵌 후 처음에는 모든 것이 새로워 보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느님께서 저를 통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교황님을 만나는 영광을 주셨을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아시아청년대회(이하 AYD) 한국대표였던 박지선(마리나·31·대전 대화동본당)씨는 “스스로 위치에서 스스로가 할 수 있는 몫을 해나가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교황 방한 후 그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AYD 봉사자 5명과 신앙모임을 시작한 것이다.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모임을 가지고 1년째 이어오고 있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모임이 아니라서 모임 이름도 없다. 그는 주 1회 대전에 모여 교회 청년들이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 중이다.

“청년들끼리 모이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시작했습니다. 일반 청년들이 가지는 고민부터 신앙생활과 멀어지는 청년들의 문제 등 다양한 문제를 나누고 짚어보면서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씨는 지난해 교황 방한 당시 청년들과 만남의 자리에서 교황에게 청년들의 고민을 질문했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준비 중인 상황을 설명하고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게 맞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의 물음에 교황은 “물질적 행복은 금방 사라지지만 가치 있는 일을 하는 행복은 계속 유지된다”는 답을 주었다.

교황의 답변은 박씨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스스로 잘 할 수 있을지, 가치 있는 일인지 고민하던 그에게 교황의 말은 큰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지난해 대전 대흥동에 독립출판물 서점 ‘도어북스’를 열고 운영 중이다.

“교황님의 말씀을 통해 확신을 얻었습니다. 제가 행복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우고 있습니다.”

박씨는 AYD에서 교황님과 만남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교황님을 만났을 때 할아버지 신부님 같으셨어요. 그만큼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친근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 ‘마리나’라고 제 이름을 불러주고 눈을 마주치고 안아주는데 정말 따뜻했습니다. 앞으로도 교황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김신혜 기자 cella@catimes.kr>

꽃동네 김일환씨

그날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

1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 손에 입을 맞추던 순간을 회고하던 김일환(레오비노·55)씨는 “1년 전이 엊그제 같고 그 때의 환희와 감격, 영광, 교황님의 온화한 미소를 너무나 생생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1988년 교통사고로 척수 장애인이 돼 하반신을 못 쓰게 되면서 휠체어에 앉아 생활하게 됐다. 2008년에 충북 음성 꽃동네에 들어왔다. 지난해 교황이 꽃동네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꽃동네 전체가 묘한 기대와 흥분에 휩싸였고 김씨도 교황이 어떤 목자인지 알고자 부쩍 노력을 기울였다.

드디어 2014년 8월 16일 꽃동네 희망의집에서 교황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김씨는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교황을 보자마자 가슴이 방망이질 치면서 감정이 복받쳤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교황님께서 장애인들에게 일일이 악수와 안수를 해주셨고 제 순서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찌나 떨리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교황이 김씨 앞에 서자 김씨의 입에서는 “아이 러브 파파”(I love Papa)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각본에 있지도 않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교황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김씨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 교황의 손을 붙잡고 입을 맞춘 후 머리를 교황 가슴에 파묻었다. “교황님 손에 친구한 시간이 5초 정도였을 겁니다. 그 5초가 무한히 길게 느껴지면서 지나온 제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 같았어요.”

교황은 본래 꽃동네 희망의집에서 30분간 장애인들과 만날 예정이었지만 30분 가까이 시간을 연장했다. 대신 수도자들과 만나는 시간을 그만큼 줄였다. 김씨는 “희망의집에서 다른 장애인들은 교황님께 안수 받고 악수만 했지만 저는 교황님과 포옹도 하고 그 분 손에 친구하면서 가장 긴 시간 동안 교황님을 만났다”며 “그날 이후 ‘교황’이라는 두 글자는 제 삶 깊숙이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기적 같은 변화는 없을지라도 교황을 만난 후 아침, 저녁기도를 빠뜨리지 않고 수시로 성체조배를 하며 교황이 희망의집에서 당부한 겸손과 기도, 용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되고 술과 컴퓨터에 의지해 살던 때도 있었습니다. 교황님을 뵙고 나 자신에 집착하던 모습을 반성하게 됐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저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